국내 중견 기업 A사 직원들은 다른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부럽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이 회사가 2019년 도입한 ‘무제한 휴가’ 덕분이다. 이 회사 직원들은 원하면 아무 때나 원하는 만큼 휴가를 쓸 수 있다. 상사의 결재도 필요 없다. 사람이 붐비는 성수기를 피해 몇 주씩 휴가를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무제한 휴가/일러스트=김영석

그런데 현실은 조금 다르다. A사가 지난해 전체 직원이 쓴 휴가 날짜를 집계해 봤더니, 전 직원이 한 해 동안 쓴 평균 휴가 일수는 13일에 그쳤다.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연차휴가 일수인 15일(1년 이상 일한 근로자가 80% 출근할 경우)에도 미치지 못한다. 직원 김모(43)씨는 “마음 편하게 휴가를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휴가를 무제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시대 흐름에 맞춰 무제한 휴가를 도입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무제한 휴가를 도입한 기업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림의 떡’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왜 그럴까.

◇골드만삭스까지 확산된 무제한 휴가

최근 미국 월가는 세계 최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내놓은 무제한 휴가 정책이 큰 화제가 됐다. 전무·상무급은 휴가를 제한 없이 쓸 수 있고, 이보다 직급이 낮은 직원들에게는 매해 최소 이틀 연차를 더 준다는 내용이다. 보수적 문화 탓에 야근이 빈번하고 휴가도 자제하는 월가에서 이 정책은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골드만삭스는 일부 애널리스트가 주당 평균 95시간 일하고 하루 5시간밖에 못 잔다는 폭로가 나올 만큼 빡빡한 근무 여건으로 악명 높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인력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살인적 근무 방식을 유지했다가는 경쟁사에 인력을 뺏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이라고 했다.

유명 기업 중 무제한 휴가를 처음 도입한 곳은 2004년 넷플릭스다.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는 저서 ‘규칙 없음(No Rules)’에서 “우리가 이룩한 대단한 혁신은 대부분 직원이 근무하지 않을 때 생각해 낸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며 “(무제한 휴가를 주는)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됐고, 지금까지도 최고 인재들을 유치하고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이후 GE와 허브스폿, 크로노스 등 무제한 휴가를 도입하는 기업이 잇따랐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취업 사이트 ‘사람인’에 따르면, 직원 채용을 위해 이 업체에 등록한 기업 중 무제한 휴가를 쓸 수 있다고 공지한 기업은 220곳에 이른다. 토스는 2019년부터 전 직원을 대상으로 무제한 휴가 제도를 도입했고,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과 BTS 소속사 하이브도 제한 없이 휴가를 쓰도록 하고 있다. 조직 인사 컨설팅 회사 콘페리의 이종해 전무는 “과거에는 금전적 보상이 중요했지만, 지금 시대의 주축인 MZ 세대가 워라밸을 중시하다 보니 이들의 욕구를 맞추기 위해 휴가를 제한 없이 쓰도록 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무제한인데 오히려 휴가 줄었다고?

무제한 휴가에 대해 겉으로 반대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다. 무제한 휴가를 도입한 B사 직원은 “전 직장에서는 급한 집안일이 생겨도 연차가 부족해 제대로 쓸 수 없었는데, 이 회사에서는 그런 것 신경 쓰지 않고 마음 편하게 휴가 내고 일을 볼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당근마켓의 한 직원도 “개발자들은 집중적으로 일한 뒤 원하는 만큼 편히 쉴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을 반긴다”고 했다.

무제한 휴가 도입 전후 휴가 일수

그런데 무제한 휴가를 실제로 쓸 수 있느냐는 점은 다른 문제다. 이 제도를 시행하는 국내 C사는 휴가를 마음껏 다녀오라고 공지했음에도 한 번에 2주 이상 휴가를 낸 직원은 지난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회사 직원은 “현실적으로 2주 이상 가면 다른 직원의 휴가를 빼앗을 수도 있기 때문에 직원들이 알아서 휴가를 자제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미국의 인사 관련 플랫폼 ‘네임리’ 조사에 따르면, 2017년 무제한 휴가 제도를 시행한 기업 임직원들은 연평균 13일 휴가를 쓴 것으로 나타났다. 무제한 휴가가 없는 기업의 평균 휴가 일수 15일보다 오히려 적은 것이다.

동료나 부하 직원들의 휴가를 알 수 없다 보니, 일을 미루거나 떠넘기는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의견도 있다. 미국의 한 채용 플랫폼 설립자는 “동료가 언제 휴가를 낼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업무와 관련된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고 말했다.

◇의무 휴가제로 회귀하는 기업도

이렇다 보니 일부 기업은 무제한 휴가제를 버리고 의무 휴가제로 회귀하기도 한다.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원격 분석·예측 플랫폼 베어메트릭스는 한때 무제한 휴가 정책을 도입했다가, 1년에 최소 4주 이상 쉬도록 하는 정책으로 바꿨다. 이 회사 조시 피그보드 CEO는 “누구는 휴가를 가지 않고, 누구는 너무 많이 가다 보니 직원들 간에 반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영국 채용 회사 언노운은 무제한 휴가 정책을 폐기하는 대신, 모든 직원에게 32일간의 유급 휴가를 주기로 했다. 올리 스콧 창업자는 “무제한 휴가 정책 때문에 오히려 직원들이 ‘내가 휴가를 얼마나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게 됐다”며 “무제한이 정확히 무제한을 의미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플로리다에서 채용 관련 기업을 운영하는 캐머런 몰 CEO는 “직원들은 ‘동료가 별로 안 쉬었는데 내가 이렇게 쉬어도 될까’ 하는 부담을 갖기 시작했다”며 “무제한 휴가 정책을 버리고 나니 직원들이 정신적으로 해방됐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도 직원들이 더 잘 쉬게 하기 위해 다양한 보완책을 내놓고 있다. 연예 기획사 하이브는 무제한 휴가제를 시행하면서도 휴가 사용을 촉진하기 위해 보너스 제도를 따로 도입했다. 팀원 모두가 연간 15일 이상 휴가를 쓸 경우 팀원 전원에게 보너스를 지급한다. 만약 팀원 가운데 한 명이라도 15일 이상 휴가를 쓰지 않으면 보너스를 받을 수 없다. 하이브의 한 직원은 “팀원들이 서로 눈치 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휴가를 쓰라는 취지”라고 했다. 현대차는 무제한 휴가제를 도입하는 대신 ‘보너스 휴가’를 신설했다. 직원이 책임급으로 승진하는 해에 5일간 휴가를 쓰면 10일간 보너스 휴가를 준다. 만약 휴가를 가지 않으면 보너스 휴가는 주지 않는다. 현대차 관계자는 “연차를 더 많이 쓰고 더 쉬도록 하기 위한 아이디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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