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한 소식은 전 세계를 긴장시켰다.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중국에 수출하는 원유에 대해 위안화 결제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1974년 석유 파동 이후 지금까지 석유 대금의 달러 결제는 세계 경제의 불문율이었다. 과거 미국 닉슨 정부가 사우디의 안보를 보장해주는 거래의 대가였다. 이른바 ‘페트로 달러(Petro Dollar)’ 체제로, 금본위제를 탈피한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준 핵심 축이다. 원유의 위안화 결제는 달러 패권이라는 견고한 댐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는 걸 뜻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러시아 간 신(新)냉전이 펼쳐지면서 수면 아래에서 기축통화 전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미국이 달러 중심 국제 금융 결제망인 스위프트(SWIFT·국제은행 간 통신협정)에서 러시아를 퇴출하는 등 강력한 금융 제재에 나서자, 러시아를 비롯해 미국과 가깝지 않은 국가를 중심으로 달러 생태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가시화된 것이다.

제재 당사국인 러시아는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유럽에 천연가스 대금을 루블(러시아 화폐)과 비트코인(가상 화폐)으로 내라고 요구했고,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을 통해 중국과 함께 단일 통화 도입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심지어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4국 안보협의체) 가입국인 인도마저 러시아와 무역을 지속하기 위해 루피(인도 화폐)와 루블로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 중이다. 중국은 이번 전쟁을 계기로 위안화 국제화 전략을 가속할 심산이다.

미·중 간 반응은 사뭇 엇갈린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분쟁은 달러와 유로화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드러냈다”며 “앞으로 위안화가 주요 기축통화로서 위상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미국 CNN은 “지난 80년간 달러로 (세계를) 지배한 미국이 기축통화 지위를 잃을 위험이 있다”며 우려를 드러냈다.

지난 2019년 2월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는 무함마드 빈 살만(왼쪽)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양국은 이날 280억달러 규모의 경제 협력 협약을 체결했다. 달러 기축통화 체제(페트로 달러)의 핵심 축이자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 국가였던 사우디는 최근 몇 년간 중국과의 협력을 계속 강화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흔들리는 달러 위상

달러의 위상은 계속 약해져 왔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달 31일 발표한 전 세계 외환보유고 데이터에 따르면, 작년 4분기 기준 총 외환보유액(12조505억달러)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율은 58.8%(7조871억달러)로 지난 20여 년 간 지속적으로 하락해왔다. 1999년만 해도 이 비율은 71%에 달했다. 기타 고피나트 IMF 수석 부총재는 “달러는 앞으로도 주요 통화로 남겠지만 더 작은 차원의 분열은 확실히 가능하다”며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달러의 지배력이 점차 약화되고 국제 통화시스템 역시 더욱 파편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달러 패권 전쟁의 최전방에 서 있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제롬 파월 의장도 지난 3월 초 의회 청문회에서 “두 개 이상의 기축통화를 보유할 수도 있다”며 위기감을 나타냈다.

반면 중국 위안화의 영향력은 점차 커지고 있다.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위안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년 4분기 현재 2.79%(3361억달러)로 아직 5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앞 순위 통화 비율은 늘지 않은 대신 위안화는 2016년 3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위안화를 통한 국제 결제는 더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이다. 중국 인민은행 보고서를 보면 작년 위안화의 국가 간 결제 거래액은 79조6000억위안(약 12조5300억달러)으로 전년 대비 75.8% 늘었다. 시준양 중국 상하이대 금융경제학 교수는 “위안화는 앞으로 10~20년 안에 세계 중앙은행의 3대 준비 통화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달러 무기화 전략 독 됐다

달러의 위상 하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달러를 지나치게 무기화한 미국의 대외 전략도 그 중 하나다. 러시아 스위프트 퇴출에서 볼 수 있듯 달러는 미국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다. 라구람 라잔 전 인도 중앙은행 총재는 달러를 “경제적 대량살상무기(WMD)”라고 불렀을 정도다.

IMF 분석에 따르면,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달러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한 시점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대(對)테러 대응을 명분으로 타국에 대한 각종 제재 수단을 마련하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린다. 가령, 스위프트 시스템 정보를 언제든 수집할 수 있게 한 ‘국제긴급경제권법’ 통과가 대표적이다. 세계 각국이 무기화된 달러를 기피하면서 탈(脫)달러화(De-dollarization) 바람이 시작됐다. 여기에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지자 각국 중앙은행들의 자산 다변화 노력은 더욱 거세졌다. 마이클 하트넷 뱅크오브아메리카 전략가는 “달러의 무기화는 달러 가치를 떨어뜨린다”며 “세계 금융시스템이 발칸반도처럼 분열되면서 기축통화의 역할이 약화됐다”고 지적했다.

그간 미국과 굳건한 경제·안보 동맹 관계를 맺고 달러 순환 펌프 역할을 해온 사우디가 갑자기 친중 노선으로 돌아선 것도 미국의 대외 정책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의 맹주인 사우디는 지난해 미국이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탈레반에 패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여기에 대해 바이든 행정부가 시아파 맹주인 이란과 핵 합의 복원에 나서자 더욱 감정이 상했다.

서방 국가들이 주도하는 탄소 중립 정책도 사우디의 마음을 중국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탄소 중립 정책이 가속화되면 탄소 배출량이 많은 석유 산업은 사양 산업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 공백을 메우려 사우디가 중국으로 시선을 돌린 셈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몇 년간 중국은 사우디가 자체 탄도 미사일을 만드는 것을 도왔고 핵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협의했다”며 “(사우디와 미·중 간) 역학 관계가 극적으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다만 달러가 약해졌다고 해서 위안화가 그 자리를 온전히 대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축통화국은 유동성 공급 역할을 수행하는 만큼 미국처럼 대규모 무역 적자를 감수해야 하는데, 무역 흑자로 경제가 돌아가는 중국이 그 역할을 맡긴 어렵다. 중국의 폐쇄적인 자본시장, 미국 달러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란 점도 위안화가 기축통화가 되는 데 제약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축통화는 유동성과 신뢰성을 모두 확보해야 하는데 위안화는 사실상 외환 거래가 통제되고 있기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화폐라 보기 어렵다”며 “아직 달러의 적수는 찾기 어렵다”고 했다.

☞기축통화(基軸通貨)

국제 무역과 금융거래에서 기본 결제 수단으로 이용되는 통화로, 1960년대 미국 예일대의 로버트 트리핀 교수가 처음 명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였던 1944년 미국 주도의 브레턴우즈 체제가 시작되면서 달러가 공식 기축통화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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