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이전 패션업계는 저렴한 가격의 신제품을 빠른 속도로 내놓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 대세였다. 패스트 패션 업체들은 환경 규제가 허술한 저개발 국가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의류를 대량 생산해 옷값을 낮췄다. 이는 과잉 소비와 과잉 생산을 낳았고, 환경 오염 문제로 이어졌다. 맥킨지에 따르면 패션 산업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10%를 차지한다.

패션온디맨드과정

팬데믹은 패스트 패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집에 틀어박힌 소비자들이 옷을 사지 않아 재고가 넘쳤고, 팬데믹에 취약한 저개발 국가의 해외 공장이 문을 닫으며 공급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는 최근 델타 변이 확산으로 주요 생산기지인 베트남·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어닝 쇼크’를 기록했다. 이에 패션업계에선 공급망 및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온디맨드(on-demand)’라는 새로운 제조 방정식을 채택하는 브랜드들이 늘어나고 있다.

늘어나는 의류 공장 니어쇼어링 수요

◇먼저 사고 나중에 만든다

온디맨드는 제품이 필요할 때만 만드는 생산 방식이다. 고객이 직접 제품을 주문하기 전까지는 제조 공장에 주문을 넣지 않는다는 뜻이다. 옷을 판매하기 최소 1년 전에 해외 공장에 대량 주문을 넣는 기성 생산 모델과는 반대로 수요 중심으로 움직인다. 주문이 들어오면 주문서를 제조 공장에 보내고, 제조 공장에서 만들어지면 창고를 거치지 않고 즉각 고객에게 배송한다. 재고가 나올 수 없는 구조다.

미국의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 레베카 밍코프는 온디맨드 제조업체인 ‘레저넌스 컴퍼니’와 협력해 일부 라인을 온디맨드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다. 고객이 옷을 주문하면 클라우드로 전송된 디자인에 따라 도미니카공화국의 레저넌스 공장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원단을 인쇄한 뒤 로봇을 이용해 패턴에 맞게 자른다. 재단된 원단은 고객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미국 내 공장으로 보내져 바느질을 해 옷으로 만들어진다. 이 공장에서 각 브랜드에 맞는 포장을 한 다음 고객에게 곧장 배송된다. 디지털 프린팅 기술과 가까운 공장 위치 덕분에 고객은 주문 후 통상 1~2주 내에 상품을 받을 수 있다.

전체 생산 과정이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각 단계에서 소비되는 자원의 양과 노동자의 임금, 작업 조건까지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다. 현재 레베카 밍코프를 포함해 25개 의류 브랜드가 레저넌스와 협력하고 있다. 로렌스 레니한 레저넌스 회장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산업이 바뀌어야 한다”며 “옷 한 벌을 팔기 위해 999벌을 더 만들어야 했던 관행을 없애면 바로 수익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패스트 패션을 대표하는 H&M그룹도 온디맨드 방식을 실험 중이다. H&M 산하 데님 브랜드인 위크데이는 3차원(3D) 스캐닝 기술 회사와 손잡고 지난해 11월부터 스웨덴에서 온디맨드 방식으로 청바지를 생산·판매하고 있다. 고객이 매장 내 설치된 비접촉식 보디 스캐너로 스캐닝을 하면 10만개의 데이터 포인트로 구성된 가상 아바타가 생성돼 맞춤 청바지가 제작된다. 고객은 매장 방문 후 2~3주 내에 청바지를 받을 수 있다. 청바지 가격은 900크로나(약 12만1200원)로, 대량 주문 생산하는 청바지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다만 아직까지 온디맨드 시장은 스타트업이 주도하고 있다. 소매 기술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 XRC랩스의 파노 안토스 창립자는 패션지 보그에 “대형 브랜드가 당장 생산 모델을 바꾸기는 어려워 패션 산업에서 온디맨드 생산이 주류가 되려면 3년은 더 걸릴 것”이라며 “그러나 모든 것이 서서히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온디맨드 방식으로 의류를 생산하는 브랜드 ‘더 키트’의 디자이너들이 레저넌스 컴퍼니 공장을 방문해 디지털 인쇄된 원단을 살펴보고 있다. /레저넌스 컴퍼니

◇활발해지는 리쇼어링

미국에선 온디맨드 제조 방식이 의류 공장의 리쇼어링(생산 기지의 본국 회귀)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처럼 동남아시아 공장에서 옷을 생산할 경우 배송까지 아무리 빨라도 최소 60일이 걸린다. 온디맨드 생산을 실현하려면 본국 또는 본국과 가까운 국가에 공장이 있어야 한다. 지난달 뉴욕에 봉제 공장을 연 레저넌스의 레니한 회장은 “미국은 지난 50년간 의류 제조업 일자리를 100만개나 잃었다”며 “패션 공급망의 모든 단계가 재구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온디맨드 제조업체인 구텐 역시 미국 뉴저지에서 오리건에 이르는 23개 공장에서 전체 주문의 70%를 생산하고 있다. 구텐의 최고경영자(CEO) 브라이언 레이니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현지 생산, 현지 배송으로 운송비를 절감하고 지역 경제를 지원해 니어쇼어링(근거리 국가 생산)과 리쇼어링을 실현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맥킨지 조사에 따르면 2025년에는 의류 브랜드의 60%가 전체 생산 물량의 20% 이상을 본국 또는 근거리 국가에서 생산할 전망이라고 답했다. 2018년에는 이 같이 응답한 브랜드가 전체의 33%에 불과했다.

본국에서 제조하게 되면 노동비용이 증가해 저개발 국가 생산보다 생산원가가 비싸진다. 반면 운송비나 창고 운영에 드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과잉 재고를 정리하기 위한 대규모 할인 행사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레베카 밍코프 CEO인 유리 밍코프는 WSJ에 “온디맨드 생산을 하면 할인 행사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기존 생산 방식과 비교해 최소한 비슷한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했다.

WeeklyBIZ MINT를 이메일로 보내드립니다.

Newsletter 구독하기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776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