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생명공학 회사 ‘백시테크(Vaccitech)’는 지난달 세계 증시가 가장 주목한 신성(新星) 중 하나였다. 백시텍은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와 옥스퍼드 대학교가 공동 개발한 신종 코로나 백신의 원천 기술을 갖고 있다. 자연히 신종 코로나 백신을 개발한 모더나와 바이온텍의 주가처럼 백시테크의 주가도 상장과 동시에 급등할 것이란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상장 당일,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다. 백시테크 주가는 이날 공모가(17달러)에 훨씬 못 미치는 14.51달러에 마감했다. 이 회사 주가는 16일 기준 여전히 공모가를 밑돌고 있다.

김빠지는 IPO 시장

비슷한 시기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중국 온라인 보험 플랫폼 회사 ‘워터드롭(waterdrop)’ 역시 상장 당일 주가가 공모가보다 19% 하락했다. 15일 현재 워터드롭 주가는 공모가보다 33%나 낮은 수준이다. 백시테크와 워터드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상장 당일 급등했던 주가가 어느새 공모가를 하회(下廻)하거나, 아예 상장 첫날부터 주가가 급락하는 종목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에 예정됐던 IPO(기업공개)를 연기하는 회사들도 나오고 있다. 금융시장에선 “세계 증시를 뜨겁게 달궜던 IPO 열기가 급격히 식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모두가 승자인 시대 지났다”

우선 ‘상장 첫날’ 효과가 사라졌다. 미국 금융 정보 업체 딜로직에 따르면 지난 1~2월 미국 증시에서 IPO를 한 기업의 주가는 거래 첫날 공모가 대비 평균 40% 이상 상승했다. 그러나 3~4월에는 상장 기업들의 거래 첫날 상승 폭이 평균 20%대로 줄었고, 지난 5월에는 18%까지 떨어졌다.

공모가 자체도 예상 범위에 못 미치고 있다. 금융 정보 업체 리피니티브에 따르면 올 1분기에는 미국 증시에 새로 상장한 기업의 25%가 예상 범위보다 높은 가격으로 공모가가 책정됐다. 그러나 2분기 이후에는 예상 범위보다 높은 가격으로 공모가가 정해지는 기업의 비율이 11%로 줄었다. 반면 예상 범위보다 낮은 가격에 공모가가 책정된 기업은 전체의 13%로, 신종 코로나 사태 이후 가장 높은 비율을 기록했다.

결국 IPO 건수마저 줄고 있다. 지난 1분기 미국 증시에 데뷔한 기업 수는 매달 100개가 넘었으나 4월에는 49개, 5월에는 45개로 줄었다. 지난달엔 기업 세 곳이 예정됐던 IPO를 연기하기도 했다. 보험회사 젠워스 파이낸셜은 “시장 변동성이 큰 탓에 제대로 된 가치 평가를 받지 못할 것 같다”며 지난달 모기지보험 부문 자회사인 인액트홀딩스의 IPO를 연기했다.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의 한 트레이더가 지난 3월 전광판을 보며 증시 상황을 확인하고 있다. 미국 증시의 IPO(기업공개)는 3월을 기점으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AP연합

◇'인플레 우려'가 발목 잡아

IPO 시장의 열기가 사그라든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최근 상장한 대형 IPO 기업의 주가 흐름이 좋지 않았다. 지난 3월 나스닥에 상장한 쿠팡이 대표적이다. 쿠팡은 IPO로 2019년 우버테크놀로지 이후 최대 규모인 46억달러(약 5조1290억원)를 조달했다. 그러나 이후 주가가 계속 하락해 현재는 상장 첫날 대비 20%나 떨어졌다. 지난 4월 나스닥에 데뷔한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coinbase)’ 역시 상장 첫날 공모가(250달러)보다 주가가 30% 뛰었다가, 지금은 공모가보다 낮은 239달러로 내려앉았다.

최근 인플레이션 우려로 증시 변동성이 심해지면서, 투자자들이 시장에서 검증받지 못한 IPO 기업 투자를 꺼리는 경향도 있다. 특히 1분기 IPO 시장 활황에 크게 기여했던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 투자 심리가 얼어붙은 탓이 크다. 데이터제공 업체 스팩리서치에 따르면 지난 5월 다른 회사와 합병을 발표한 스팩 주식 23개 중 단 2개만이 공모가인 10달러를 웃돌고 있다. 투자회사 T로프라이스의 리처드 레예스 매니저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성장주를 선호하지 않는 시장 환경이 IPO와 스팩주를 힘들게 만든다”고 했다. 투자자들의 포트폴리오가 가치주 위주로 재편되면서 기술주·성장주가 대다수인 IPO 주식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국내선 공모주 열기 여전

국내 공모주 시장에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지난달 상장한 7개 종목 중 에이치피오, 씨앤씨인터내셔널, 샘씨엔에스, 진시스템 등 4개의 시초가가 공모가를 밑돌았다. 지난해 SK바이오팜과 카카오게임즈, 올해 SK바이오사이언스 등 IPO 대어들이 잇따라 ‘따상(공모가 2배 이후 상한가 직행)’을 기록하면서 투자자 사이에 ‘공모주 묻지 마 투자’ 열풍이 불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래도 국내 투자자의 관심은 여전히 뜨거운 편이다. 금융 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4일 기준 설정액 10억원 이상 공모주 펀드에 최근 일주일간 1047억원이 유입됐다. 같은 기간 국내 주식형 펀드에서 5896억원의 자금이 유출된 것과 비교된다. 공모주 펀드로 자금이 몰리는 이유는 올 하반기 LG에너지솔루션, 카카오뱅크, 크래프톤 등 IPO 대어의 상장이 예고돼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오는 20일부터 공모주 중복 청약이 금지되면 IPO 시장 열기가 다소 누그러질 가능성이 크다. 매슈 케네디 르네상스캐피털 수석 전략가는 투자 전문지 배런스에 “IPO 시장은 지속하겠지만 높은 가격 압박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며 “탄탄한 펀더멘털(실적)을 갖춘 기업들만이 IPO 시장에 나올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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