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의 우버’라 불리는 차량공유·배달업체 ‘그랩(Grab)’이 지난 13일 SPAC(기업인수목적회사)와 합병을 통해 수개월 내 미국 나스닥에 상장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랩이 상장 준비 과정에서 평가 받은 기업가치는 396억달러(약 44조3000억원)에 달한다. 역대 SPAC 상장 중 최대 규모다. 동남아 최대 인터넷 쇼핑 서비스 ‘쇼피’를 운영하는 싱가포르 기업 ‘씨(Sea)’의 주가는 지난 한 해 397% 폭등했다. 2017년 뉴욕 증시 상장 전 37억5000만달러였던 기업가치는 현재 1270억달러(시가총액)를 넘어섰다. 미국에 상장된 아시아 기업 중 최대 상승 폭이다.

미국 증시 상장을 앞둔 동남아 유니콘 그랩(①)과 인도네시아 고젝(②)의 배달 직원들. 2017년 10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에 성공한 싱가포르 기업 씨(③)는 지난 한 해에만 주가가 5배 가까이 뛰었다. 동남아 물류 기업 중 첫 유니콘이 된 J&T익스프레스(④)는 지난달 항공 화물 사업 진출을 선언하며 전용 화물기도 공개했다. /그랩·고젝·테크소스·페이로드아시아

동남아 테크 기업들의 가치가 급등하면서 전 세계 투자자들의 눈이 이 지역으로 쏠리고 있다. 동남아는 국영 기업 중심의 산업 구조로 인해 딱히 주목할 만한 기업이 없었지만, 디지털 경제를 등에 업은 IT 분야 유니콘(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인 스타트업)들이 등장해 최근 크게 몸집을 불리더니 수익성까지 확보해 가고 있다. 그랩에 이어 인도네시아의 온라인 여행사 ‘트레블로카’와 전자상거래 기업 ‘부칼라팍’도 미국 증시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글로벌 투자펀드 캐세이 캐피털의 라지브 케숩 투자 담당 이사는 미국 경제 매체 블룸버그에 “지금이 동남아시아 시장의 황금기(golden period)”라며 “향후 더 많은 (세계) 자본이 이 지역으로 유입될 것”이라고 했다.

◇동남아 유니콘의 질주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츠 등에 따르면 현재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국에 속한 유니콘 기업은 상장한 시를 제외하면 모두 12개다. 전 세계 유니콘 기업이 650개 이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비중이 높지 않지만, 지난 2014년 그랩이 아세안 최초의 유니콘이 된 후 단 7년 만에 이룩한 성과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동남아에서 유니콘 기업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그만큼 짧아지고 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민간 정책연구단체 KCERN(창조경제연구회) 조사 결과, 2000년 이후 창업한 308개 유니콘 기업이 10억달러 기업 가치를 달성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평균 6년이다. 그러나 그랩(2012년 설립)과 함께 필리핀 건축 스타트업 레볼루션 프리크레프티드(2015), 인도네시아 핀테크 기업 OVO(2017) 등 2010년대 등장한 동남아 유니콘 기업이 기업 가치 10억달러를 달성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단 2년에 불과했다.

기업 가치만큼이나 매출 성장도 가팔랐다. 그랩의 경우 작년 총 거래액은 125억달러(약 13조9300억원)로 2018년 대비 두 배 이상 늘어났고 순매출(net revenue)은 전년 대비 70% 올랐다. 동남아 시장에서 그랩의 최대 경쟁자로 분류되는 인도네시아의 차량공유·배달업체 고젝(Gojek) 역시 작년 10월 총 거래액이 120억달러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성수기인 11~12월 거래액이 빠져 있음에도 전년 대비 10% 늘어난 금액이다. 상장한 씨 역시 작년 총 매출이 44억달러로 전년 대비 101.1%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연령 30세의 젊은 시장

동남아 유니콘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차량 공유 플랫폼이나 전자 상거래, 핀테크 등으로 그리 새롭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업 아이템이나 수익 모델이 우수하기보다 동남아 시장의 환경 자체가 좋기 때문이다. 아세안 지역은 총인구가 6억6730만명에 달하고, 평균 연령은 30세에 불과한 ‘크고 젊은 시장’이다.

고령화에 접어든 선진국과 달리, 디지털 환경에서 나고 자란 ‘디지털 네이티브’가 밀집해 전자상거래, 전자지갑, 모바일 앱 등 온라인 기반의 테크 사업이 더 빨리 번창할 수 있다. 싱가포르 컨설팅 기업 아시아마켓엔트리는 “동남아 지역 인구의 약 26%가 14세 미만으로 미국(19%)과 중국(18%)보다 시장 잠재력이 높다”며 “젊은 소비층은 IT 기술 사용에 더 능숙하고 개방적”이라고 분석했다.

인구 규모 2억7350만명(세계 4위)으로 아세안 국가 중 가장 큰 시장인 인도네시아가 대표적이다. 인도네시아 디지털 경제는 5년간(2015~2020년) 연평균 41%의 성장률을 보였다. 단적으로 작년 한 해에만 약 2500만명 신규 인터넷 사용자가 유입됐다. 디지털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관련 기업들의 사업 확장도 활발하다. 인도네시아의 첫 유니콘 고젝만 하더라도 2010년 오토바이 호출 앱 하나로 시작해 지금은 고마트(식료품 배달), 고클린(집 청소), 고페이(모바일 결제) 등 10여 개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퍼 앱’ 서비스가 됐다.

뜨거운 창업 열기에 힘입어 동남아 유니콘은 앞으로 줄줄이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스타트업 조사기관 스타트업 랭킹에 따르면 올 2월 기준 인도네시아에는 2204개, 싱가포르에는 960개의 스타트업이 있다. 인도네시아는 미국·인도·영국·캐나다를 이은 세계 5위, 싱가포르는 12위다. 한국은 327개로 38위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서구 시장의 성장세가 둔화하고, 미국과 중국, 인도 간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인도네시아가 차세대 글로벌 테크 산업 기지로 떠오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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