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음식 배달 업체 ‘딜리버루(Deliveroo)’는 올해 런던 증시에서 가장 주목받는 IPO(기업공개) 기업이었다. 상장 전 평가된 기업 가치는 88억파운드(약 13조7000억원)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박’의 꿈은 상장 첫날 무너졌다. 지난달 31일 첫 거래가 시작되자 딜리버루의 주가는 급락했고, 공모가 대비 26.3% 하락 마감했다. 배달원의 열악한 처우가 문제가 불거지면서다. 영국 비영리 매체 TBIJ에 따르면 딜리버루 배달원 3분의 1 이상이 최저임금인 시간당 8.72파운드(약 1만3618원)도 못 벌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딜리버루 배달원들은 일주일 내내 일해도 월 200~600유로(약 26만~80만원)밖에 벌지 못한다는 프랑스 공영 RFI 라디오의 보도도 나왔다. 이후 영국 최대 자산운용사 리걸앤드제너럴(LGIM)이 딜리버루 공모 불참을 선언했고, 애버딘 스탠더드, 아비바, M&G 등 다른 대형 운용사들이 줄줄이 그 뒤를 이었다. LGIM은 “정부가 ‘긱 이코노미(gig economy·키워드)’ 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수 있다”면서 “(이들의) 잠재적 부실 경영 행태에서 투자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긱 이코노미는 음식 배달과 승차 공유처럼 디지털 중개 플랫폼(기반 서비스)을 활용해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고객)과 이를 제공할 사람을 연결해 주는 비즈니스다. 이 과정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은 고용된 노동자가 아닌, 개인 사업자로 취급해 왔다. 최저 임금이나 퇴직금은 물론 사회 보험 가입도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처럼 극도로 유연한 노동 계약과 낮은 진입 장벽 덕분에 서비스 제공 비용이 크게 낮아진다. 긱 이코노미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이어진 글로벌 경기 악화와 실업 사태 속에 종사자가 급증, 싼값으로 편리한 서비스를 누리면서 실업도 해결해주는 혁신 산업으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성장의 발판이었던 ‘노동 유연성’에 발목이 잡혀 이젠 긱 이코노미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 됐다.

/일러스트=김영석

◇‘노동 유연성’ 사라지면 경쟁력 잃어

지난 2월, 승차 공유 업체 우버(Uber)가 영국 내 우버 운전자의 법적 지위를 둘러싼 5년간의 법적 분쟁에서 최종 패소한 것이 결정타였다. 영국 대법원은 당시 “우버 운전 기사들도 최저임금과 유급휴가, 휴일수당, 연금 등을 받을 권리가 있는 근로자로 분류해야 한다”고 만장일치 판결했다. 우버는 “우버 기사는 자기 차로 필요에 따라 영업하는 자영업자”라며 버텼지만, 영국 대법원은 “우버가 요금 책정, 차량 배정, 운영 경로 지정까지 해주니 고용주나 다름없다”고 판단했다.

우버는 결국 영국 내 우버 기사 7만명을 근로자로 재분류하고, 의료보험과 휴일수당, 연금 혜택까지 제공키로 했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이로 인해 우버의 올해와 내년 비용이 2억5000만~3억5000만달러(약 2830억~3960억원)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우버가 영국에서 승차 서비스로 받는 돈(승차 예약액)의 8~10%에 해당한다. ‘유연한 노동에 기반한 저비용 구조’라는 긱 이코노미의 장점을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유럽의 긱 이코노미 업계 전체를 강타했다. 미국 증권사 웨드부시는 “(우버의 패소가) 유럽 전역의 긱 이코노미 기업 생태계에 상당한 타격(손실)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딜리버루는 이미 5개 국가에서 소송에 직면했다. 벌금과 기타 소송 관련 비용에 대비한 충당금이 지난해 1122만파운드(약 174억원)에 달했을 정도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올 연말까지 긱 이코노미 종사자들의 법적 지위에 관한 새로운 법률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영국 ADCU(앱 운전사 및 택배원 연합) 소속 우버 기사들이 2월 19일 영국 대법원 판결을 태블릿PC로 확인한 뒤 환호하고 있다. 영국 대법원은 이들이 자영업자가 아니라 우버에 속해 일하는 근로자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AP연합

◇입법으로 해결 추진… 노사 모두 ‘반대’

한국에서도 똑같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플랫폼 노동자’ 문제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플랫폼 노동자는 전체 취업자의 7.4%인 179만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플랫폼이 일을 배정하는 등 업무의 핵심 역할을 하는 배달 앱 기사 등이 22만3000명이었다.

정부는 이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올해 안에 ‘플랫폼 종사자 보호법’이라는 특별법을 마련할 계획이다. 장철민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 대표 발의한 법률안은 “플랫폼 기업은 종사자와 서면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고, 공제회를 설립해 퇴직 급여를 지급할 수 있다”면서 “계약 해지 전 최소 15일 전에 계약 해지의 내용과 이유, 시기 등을 서면으로 알려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이 특별법은 기업은 물론, 노동계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플랫폼 기업들은 “(특별법이 제정되면) 소비자 가격에 부담이 전가되고, 신생 플랫폼 기업의 성장을 저해한다”고 우려한다. 디자인, 프로그래밍, 번역 같은 업종과 배달, 대리운전을 똑같은 플랫폼 노동자로 묶어 규율하는 이 법의 내용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계는 특별법을 만드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입장이다. “특별법이 아닌, 일반 근로자와 마찬가지로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대 노총은 “정부의 (특별법) 대책에는 본질적으로 ‘플랫폼 종사자는 근로자가 아니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비판했다.

☞긱 이코노미(gig economy)

특정 기업과 고용계약을 맺고 일하기보다, 앱 같은 디지털 플랫폼(기반 서비스)을 통해 그때그때 제공되는 일거리를 잡아 돈을 버는 경제 활동.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는 ‘디지털 장터에서 거래되는 기간제 근로’라고 정의한다. 1920년대 미국 재즈클럽에서 단기적으로 섭외한 연주자를 ‘긱(gig)’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자신이 이미 보유한 자산(차량이나 컴퓨터 등)과 여유 시간을 활용하는 ‘부업’ 개념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이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사실상의 전업 노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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