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브라

1897년 문을 연 일본 필기구 기업 제브라는 미쓰비시연필, 파일롯과 함께 일본 필기구 시장의 ‘삼대장’(御三家) 중 한 곳으로 꼽힌다. 100년 넘게 필기구 시장에서 변신과 성장을 거듭했다. 손 글씨와 점점 멀어지는 스마트폰 시대에도 꾸준히 매출을 늘려가는 중이다. 지난해 매출은 231억엔으로 5년 전보다 13% 늘었다. 3대째 이 회사를 이끄는 이시카와 신이치(石川真一·69) 제브라 사장을 최근 화상 인터뷰로 만나 펜으로 장수하는 비결을 물었다.

◇"세상이 바뀌면, 펜도 바뀐다″

-100년 넘는 장수 비결이 궁금하다.

“품질 좋은 펜을 내놓으면 반드시 팔린다. 펜을 사는 사람들은 항상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 여러 차례 변신도 했다. 120년 전 창업 당시 주력 상품은 펜촉이었다. 일본 최초로 강철 펜촉을 만드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할아버지는 ‘펜촉만 팔면 100년은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착각이었다. 아버지가 사장에 취임했을 즈음 볼펜이 등장했다. 1960년대의 일이다. 필기구 시장의 변화를 감지했던 그는 미국, 유럽에 건너 가서 어렵게 배워 볼펜 기술을 들여왔다. 다행히 위기를 잘 넘겼다. 1998년 내가 사장이 됐더니, 세상은 또 바뀌어 있었다. 볼펜만 팔아서는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젤잉크, 유성마커, 샤프 등 다양한 필기구를 개발하고 팔아야 했다. 우리 회사는 경영자가 바뀔 때마다 주력 상품이 바뀌는 특징이 있다.”

매년 1억 자루가 팔리는 제브라의 주력 제품인 사라사클립. /제브라

-중국 리커창 총리가 펜 기술이 부족하다고 한탄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최근 중국 필기구 품질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 소비자가 더 좋은 필기구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은 펜을 만들 수 있는 이유도 우리의 주요 고객이 펜 품질에 대해 매우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소비자 특유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100엔(약 1100원)짜리 필기구를 살 때도 굉장히 깐깐하게 고른다. 잉크를 끝까지 쓸 수 있는지, 잉크가 중간에 끊겨 흰 줄이 생기는지 등 다각도로 품질에 집착한다. 일본과 한국의 고객센터에선 하루에도 여러 건의 문의를 받는다. 미국 소비자들은 펜에 대해서 그냥 무덤덤하다. 한국·일본 소비자의 특징이 결코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소비자 요구를 극복해야 선택받고, 그렇기 때문에 게으를 수가 없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강조한 경영 철학 중에 무엇이 기억에 남나.

“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회사 전체가 겸손함을 강조한다. 매출이 늘거나, 상품이 좋은 평가를 받을 때 반드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라고 강조했다.”

이시카와 신이치 제브라 사장은 지난 20여 년간 회사를 이끌었다. 그는 “앞으로 10~20년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세상이 된다 해도, 펜의 사용자는 여전히 인간일 것”이라며 “회사를 맡을 다음 세대가 그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제브라

◇"펜을 지탱하는 건 인간이다"

지난해 나온 제브라의 신제품 ‘블렌’은 800만 자루가 팔렸다. 이 펜은 ‘저소음’ 기술을 탑재해 글씨를 쓸 때도, 심지어 펜을 흔들어도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는 “연간 1억 자루 정도 팔려야 ‘히트 상품’이라 친다”고 했다.

-10년 후 제브라는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할까.

“지금 내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라고 본다. 회사를 맡을 다음 세대가 내려야 할 결정이다. 난 제브라가 필기구에만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명심해야 할 점은 이 회사가 100년 넘게 위기를 넘길 수 있던 것도 모든 직원이 한 몸으로 뭉치는 사풍(社風)이 있기 때문이었다. 톱다운과 복종만으로는 정말 불가능하다. 내가 생각하는 변화가 진정한 변화인지, 현장 직원 등 모두의 의견을 참고해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또한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는데 펜의 사용자는 100% 인간일 것이란 사실이다. 10~20년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제브라를 지탱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제브라의 체크펜 /제브라

인터뷰 중 최근 필기구 시장의 트렌드를 묻자 이시카와 사장은 품에서 주섬주섬 자사 제품인 ‘체크펜’과 종이를 꺼내보였다. 체크펜의 특징은 펜으로 덧칠한 부분 위에 초록색 시트를 얹으면 덧칠한 부분만 제외한 채 보이는 기능이다. 그는 “펜을 만들 땐 무엇보다 ‘쓰기 쉽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요즘은 라이프스타일에 밀착한 ‘플러스 알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이 체크펜의 ‘플러스 알파’는 무엇일까. 그는 “영어 단어 등을 외울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고 했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소비자의 특징은.

“우리 회사 제품 중 ‘마일드라이너’란 제품이 있다. 잉크가 옅은 편이라 눈이 피로하지 않고, 펜 모양도 귀엽다. 10년 전 출시했을 땐 잘 안 팔렸던 상품인데, 3~4년 전부터 갑작스레 매출이 늘었다. 일부 소비자가 이 펜으로 그림을 그린 후 인스타그램에 펜과 함께 귀여운 사진과 영상을 올려준 덕분이다. 소셜미디어에서 소문을 탄 것이다. 과거 소비자는 단순히 쓰기만 했다면, 21세기 소비자는 자발적으로 서포트를 해준다. 우리 세대에서는 상상 못할 소비 방식이다.”

제브라 매출

-스마트폰 확산으로 필기구 수요가 줄어드는데.

“미국, 일본, 한국은 더 수요가 늘어나기 힘들다고 본다. 일본의 경우 인구 감소로 수요가 줄어들고, 스마트폰·전자기기 확산으로 전반적으로 필기구 시장도 타격을 입었다. 현재는 해외 시장 공략에 공을 들이는 중이다. 특히 동남아시아, 중남미, 동유럽 등 신흥국은 아직 시장 잠재력이 있다. 필기구는 인구가 늘어나면 수요가 자연스레 늘어나기 때문이다.”

-미래에 필기구는 어떻게 진화할까.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필기구로 글씨를 쓸 때와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로 문서를 남길 때 쓰이는 뇌의 부위는 전혀 다르다. 똑같은 문서를 만들어도 필기구로 쓰면 기억에 조금 더 잘 남지 않나. 필기구 사용의 이점(利點)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여러 뇌 과학 연구를 토대로 언젠가 ‘영어 단어가 잘 외워지는 필기구’ ‘뛰어난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필기구’ 이런 상품도 만들 수 있다고 상상해본다.”

-한국 시장은 어떤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한국 문구업계에 골프 대회를 만들었을정도로 한국 시장에 애착이 많다. 최근 20년 간 한국엔 매년 1~2번은 방문했을 정도로 출장도 많이 다녔다. 한국 소비자와 일본 소비자는 참 닮은 점이 많다. 앞으로도 사랑받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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