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동구에 사는 김모(43)씨는 매주 일요일 아침 “아빠 거기 가자”며 졸라 대는 두 자녀의 호들갑에 잠에서 깬다. 재활용품 PET병 뭉치와 캔 뭉치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차에 실은 뒤 서울 어린이대공원 정문 앞으로 간다. 커다란 자판기처럼 생긴 기계에 가져온 재활용품을 하나씩 넣는다. 캔이 찌그러지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그렇게 PET병 27개와 캔 12개를 넣고 기계 화면에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한다. 525원어치 포인트를 적립했다. “아빠, 그건 우리 용돈으로 줄 거지?”

수퍼빈은 '재활용 분리수거' 사업에 뛰어든 스타트업이다. 지난 10일 경기 분당 수퍼빈 사무실에서 만난 김정빈 대표가 오른손엔 PET병 뭉치를, 왼손엔 돈 주머니를 들었다. 김 대표는 "재활용품도 가공만 잘하면 얼마든 돈이되는 소재"라고 말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버리면 돈을 주는 이 쓰레기통의 이름은 ‘네프론.’ 쓰레기 분리수거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 수퍼빈이 개발한 기계다. 이 회사 김정빈(47) 대표는 “아빠들에겐 분리수거가 ‘귀찮은 집안일’이었지만, 아이들에겐 용돈벌이이자 놀이”라며 “재활용 문화가 바뀌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수퍼빈은 지난 8월 200억원 규모의 시리즈 B 투자를 유치했다. 누적 투자액은 272억원, 기업 가치는 1000억원을 넘겼다. 반도체와 인공지능이 대세일 것 같은 스타트업 세상에서, ‘쓰레기’로 승부하겠다는 수퍼빈의 이야기를 들었다.

◇‘쓰레기도 돈이고 재활용도 놀이다’

수퍼빈은 지난해 네프론 판매 및 운영으로 20억원 수준의 매출을 거뒀다. 현재 네프론은 전국 학교·공원·주민센터·아파트단지 등에 160대 정도 설치돼 있고, 매달 10~20대가 새로 세워지고 있다. “지자체나 공단에서 매주 10건 이상 설치 문의 전화가 옵니다. 사실 한두 대만 놓으면 오히려 저희는 관리 비용이 더 들거든요. 분리수거를 장기적으로 보시는지 면담을 거쳐서 설치하고 있어요. 사주시겠다는 데 저희가 고르려니 민망하죠.”

네프론이 보통 쓰레기통과 다른 점은 ‘실제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만 받는다’는 점. 기계 안에 탑재된 센서가 재활용품을 인식, 심하게 오염됐거나 아예 재활용이 안 되는 소재는 반품한다. 수거한 재활용품은 민간 수거업체에 넘긴다. 수익을 남기되, 일부는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과 포인트 형식으로 나누는 것이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 근처에도 수퍼빈이 개발한 인공지능(AI) 쓰레기통 '네프론'이 설치돼 있다. 지난해 6월 재활용품 분리수거를 시연하는 모습. /김지호 기자

사실 아파트 단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재활용품 중 70%는 재활용되지 못하고 소각·매립된다. 플라스틱에도 PET, PS, PP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한데 섞여 나오는 데다 수거 과정에서 오염돼 쓸모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짬짜면을 시켰는데 서로 넘치고 섞여서 배달된 셈”이라고 묘사했다.

투명 PET병만 모아 세척한 뒤 잘게 부수면 ‘플레이크’가 된다. 이걸로 다시 PET병 같은 완제품을 만들 수 있다. 이 정도 수준의 A급 플레이크는 유럽·일본에서만 나오는데, 가격이 1㎏당 1500원 정도로, 국내에서 팔리는 재활용품 뭉치(1㎏당 150원)의 10배 정도다. 수퍼빈은 곧 공장을 짓고 연간 4만톤 분량의 A급 플레이크를 직접 생산한다. 한국은 매년 1조원 이상의 A급 플레이크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는데 이를 대체한다는 계획이다.

국내 재활용품 중 70%는 분리가 잘 되지 않았거나, 수거과정에서 오염된 탓에 결국 소각·매립된다. 수퍼빈 김정빈 대표는 "재활용품 자원이 제대로 재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수퍼빈의 설립 목적"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가 재활용 PET병을 한 손에 들고 활짝 웃고 있다. 그의 옆에 있는 플라스틱 상자는 곧 출시될 '신형 네프론'의 모형. /김연정 객원기자

◇"아수라 지옥을 해결하는 일"

김 대표는 코넬대 경제학박사, 하버드대 행정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2013년엔 40세 나이로 중견 철강업체 코스틸의 대표이사까지 지냈다. 그러나 2년 만에 대표직에서 물러나 스타트업에 뛰어들었다. 김 대표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며 “'돈이 되느냐'보다는 ‘옳은 일이냐’가 제겐 더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김정빈 수퍼빈 대표는 "재활용품도 잘만 가공하면 '돈'이 되는 소재"라고 말했다. 김 대표가 '원화(₩)' 표시가 붙은 재활용품 뭉치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 일반 재활용품 PET병 뭉치는 1Kg당 150원에 불과하지만, 이를 '플레이크'로 형식으로 가공하면 10배 이상의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아이템을 찾던 중 눈에 들어온 게 분리수거였다. “처음엔 ‘아파트 단지의 재활용품 판매 수익을 주민들이 나눠 가지게 해야겠다’고 생각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사업을 키우던 중 우연히 찾아간 쓰레기 선별장에서 ‘아수라 지옥’을 봤어요. 온갖 쓰레기가 뒤섞인 산이 있는데, 이게 매주 새로 생겨난대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는 쓰레기에 파묻혀 죽겠다 싶었어요.”

수퍼빈은 37명이 일하는 작은 회사다. 20여 명은 분당 사무실에 있지만, 10여 명은 네프론 관리 때문에 구미·여수·삼척 등에서 현장 근무를 한다. 인터뷰 날 사무실엔 마침 20대와 50대 직원이 신형 네프론 내부 설계안을 두고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있었다. 김 대표는 “경험·지식이 다른 사람들끼리 머리를 뭉쳐야 창의적 아이디어가 나온다”며 “이런 다양성을 조직 내에 두려고 엄청 신경 쓰고 있다”고 했다.

수퍼빈은 '쓰레기는 돈이고, 재활용은 놀이'라는 명제를 앞세운다. 수퍼빈 김정빈 대표가 분당 사무실 안에 놓인 대형 쓰레기통에 PET병을 던져봤다. 그는 "예전엔 재활용품 분리수거가 귀찮은 집안일이었지만, 앞으론 놀이처럼 여겨지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시리즈 B 투자엔 화인자산운용이 세아글로벌CNS를 주요 출자자로 하는 펀드를 구성해 참여했다. 앞서 투자했던 휴맥스와 TBT도 후속 투자를 단행했다. 임정욱 TBT 대표는 “대기업과의 협력 길이 열려 있어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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