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4월 글로벌 주요 기업 경영진과 화상 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손에 들고 ‘미국 반도체 자립’을 선언하고 있다./AP 연합뉴스

미국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자립주의’의 방향성은 명확하다. 반도체를 처음 발명한 나라이지만, 동아시아에 빼앗긴 반도체 패권을 되찾아와 반도체 설계부터 생산, 첨단 패키징까지 모든 생산 공장을 미국 안에 짓겠다는 것이다. ‘반도체 굴기’를 앞세워 도전하는 중국에 대해서는 2022년 10월 첨단 반도체 생산 설비 수출 중단 조치를 취하며 ‘반도체 전쟁’을 선포했다. 동맹국인 한국과 대만 기업을 대상으로는 2~4나노급 첨단 반도체를 미국에 투자하도록 유도했다. 현재 2~4나노급 반도체의 70~80%는 동아시아에서 생산되는데, 앞으로 절반 정도는 미국에서 만들어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삼성전자로부터 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시설), 첨단 패키징 공정 라인 투자도 받아냈다. 삼성전자뿐 아니라 TSMC도 미국에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 공장을, SK하이닉스는 첨단 패키징 공장을 미국에 건설한다. 이렇게 되면 구글·메타·테슬라 같은 미국 빅테크가 칩을 설계해 미국 내 파운드리에서 생산하고, 첨단 패키징 공장에서 마무리해 직접 받아 쓰는 ‘미국 내 자체 생태계’가 완성된다.

그래픽=양인성

바이든 대통령이 2021년 4월 ‘반도체 자립’을 선포하며 중국과 벌인 반도체 전쟁 1000일의 결과, 미국은 첨단 반도체 부문에선 확실한 주도권을 잡았다는 평가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중국은 첨단 인공지능(AI) 반도체 공급이 끊기면서 AI 경쟁력이 미국에 2년 이상 뒤지게 됐다”며 “미국이 (중국의 급소를) 정확히 찌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도체 무기로 중국 꺾은 미국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미국은 중심이 아니었다. 실리콘밸리 첨단 테크 기업들이 반도체를 설계하지만, 생산은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담당했다. 반도체 주요 핵심 소재와 장비는 일본과 유럽이 공급한다.

중국과의 반도체 전쟁 이후 미국은 이른바 ‘칩4′라는 동맹을 결성해 한국·일본·대만을 끌어들이고, 동아시아 중심 생산 공급망을 미국 현지로 끌어오는 전략을 펼쳤다. 2022년 미국은 여야가 초당적으로 ‘반도체 지원법(칩스법)’을 통과시켰다. 527억달러(약 73조원)의 막대한 보조금이 담긴 ‘칩스법’의 취지는 명확하다. “반도체 생산에 있어 미국이 동아시아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미 의회조사국 보고서)”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국과 대만은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미국 입장에선 불안한 측면이 있다”며 “미국이 자국 내에 설계부터 생산, 패키징까지 완결된 공급망을 갖추려는 이유”라고 말했다.

◇”동아시아 반도체 의존은 당분간 계속”

한국·일본·대만 동아시아 3국은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동참하면서도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은 사실상 반도체에 ‘국운’을 건 상태다. 투자금도 자국 투자가 압도적이다. 삼성은 향후 20년 동안 500조원이 넘는 돈을 국내에 투자한다. TSMC도 자국에 130조원이 넘는 돈을 쏟아붓는다. 일본도 자국 대기업 연합(라피더스)뿐 아니라 대만(TSMC)까지 끌어들여 반도체 부활을 꾀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이 첨단 AI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동아시아 공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TSMC와 삼성전자가 미국에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 시설을 짓기로 했지만, 여전히 D램 분야는 한국이 압도하고 있다. 특히 AI 반도체 분야에서 고대역폭 메모리(HBM) 같은 고성능 D램이 각광받으면서, 메모리 강국인 한국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또 TSMC의 반도체 공정 중장기 계획을 보면 미국에서는 2028년에야 3나노 공정에 들어가지만 대만 본토에서는 내년부터 2나노 공정 양산이 시작될 전망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아무리 미국에 첨단 공장을 짓는다지만, 결국 대만과 한국 모두 최첨단 공정은 모두 자국 중심으로 운영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