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명 유튜버들의 최대 소속사(MCN·다중 채널 네트워크)인 스타트업 ‘샌드박스 네트워크’가 감원 및 사업부 매각·축소를 포함하는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샌드박스는 27일 “시장 상황 변화에 따라 커머스 사업을 매각하고, e스포츠 대회 운영 사업은 종료한다”고 밝혔다. 샌드박스는 전체 직원 560명 중 일부 직원들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한 상태다.

샌드박스는 2014년 창업 이후 국내에서 가장 많은 470여 명의 유튜버를 거느린 대형 스타트업으로 성장했다. 유튜버 육성과 콘텐츠 제작·광고 영업이 핵심 사업 모델이다. 도티·곽튜브 같은 유명 유튜버들이 소속돼 있고, 김연경·정찬성 같은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 유튜브 콘텐츠도 제작한다. 창업자 이필성 대표는 “시장 1등이라 무난히 투자를 유치할 줄 알았는데 상반기에 추진했던 대규모 투자 유치가 무산됐다”며 “3개월 비상 경영을 했지만 그래도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샌드박스는 지난해 매출 1136억에 121억원의 적자를 냈다.

글로벌 경기 침체 속 스타트업 투자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국내 ‘스타급’ 스타트업들마저 잇따라 한계 상황에 봉착해 구조조정과 회사 매각에 나서고 있다. 배달 대행 국내 1위인 메쉬코리아(서비스명 부릉)는 법정관리와 매각이 동시에 추진되고 있고 토종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왓챠도 긴급 자금 수혈 후 대기업을 상대로 매각 의사를 타진 중이다. 투자 업계 돈줄이 마르면서 덩치 작은 스타트업들이 줄줄이 쓰러진 데 이어 최근엔 업계 간판 자리를 굳건히 지켰던 스타트업들도 투자금 조달 실패와 적자 폭증에 백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정부의 모태펀드조차 내년 예산을 올해보다 40% 축소한 상황이라 내년엔 스타트업 업계 한파가 훨씬 거셀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메쉬코리아는 상반기 구조조정에 나섰지만 투자 유치에 실패하면서 지난 25일 결국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수많은 배달 대행 업체 중 매출 1위 서비스 ‘부릉’을 운영하는 메쉬코리아는 지난해 적자 368억원을 냈다. 운영 자금이 소진되자 창업자 유정범 의장이 자신의 지분을 담보로 OK캐피탈로부터 360억원을 대출받았지만 이마저 상환 기한을 넘겼다. 업계 관계자는 “메쉬코리아가 몸값을 70% 이상 낮춰 투자를 받으려고 했으나 그마저 실패했다”며 “채권단은 빨리 회사를 매각하길 원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처 투자 금액은 약 4조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821억원(24.3%)이나 증가한 역대 최고 금액이었다. 하지만 하반기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지난 3분기 벤처 투자 규모(1조2525억원)는 작년 3분기에 비해 40%나 급감했다. 경기 침체 우려에 투자자들이 위축되면서 스타트업으로 가는 자금이 뚝 끊긴 것이다. 풍부한 유동성을 등에 업고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던 스타트업들은 예상했던 투자금이 들어오지 않자, 급전을 빌리거나 직원들을 내보내고 있다. 업계 1등을 유지한 덕분에 그간 수월하게 투자를 유치해왔던 간판급 스타트업들마저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출혈 경쟁 심했던 신선식품·커머스 시장, 긴급 대출 받고 전 직원 권고사직도

이런 한계 상황은 출혈 경쟁이 치열했던 유통·커머스 시장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국내 신선식품 유통 스타트업 정육각은 지난 23일 신한캐피탈로부터 빌린 단기대출 370억원의 만기를 가까스로 6개월 연장했다. 2016년 창업한 정육각은 직접 가공한 축산물과 신선식품을 문앞까지 새벽 배송 해주는 서비스가 입소문을 타면서 빠르게 성장, 기업 가치가 1000억원을 넘겼다. 하지만 올해 초 신선식품 유통 업체 초록마을을 인수한 것이 화근이 됐다. 정육각은 1500억원대 대규모 투자를 받아 인수 대금 900억원을 조달하려 했지만, 투자금이 기대에 크게 못 미쳐 대출을 받은 것이다.

수산물 당일 배송 서비스로 160만 월간 방문자를 모으며 돌풍을 일으켰던 오늘회(오늘식탁)는 사실상 서비스 중단 상태다. 투자 유치가 불발되면서 협력사에 지급해야 할 대금까지 연체됐던 오늘회는 결국 지난 9월 서비스를 중단하고 전 직원 상대로 권고사직을 단행했다. 오늘회는 현재 수산물이 아닌 10개 내외 식품을 배송하는 서비스만 하고 있다.

투자 업계 관계자는 “메쉬코리아는 이륜차가 아닌 사륜차 식자재 배송까지 사업을 급속하게 확장했고, 오늘회와 정육각은 1등 자리를 굳히기 위해 마케팅과 기업 인수에 큰돈을 썼다”며 “패션, 명품 플랫폼들도 모두 100억원 이상 적자라 곧 한계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늘어나는 스타트업 매각, 내년 더 힘들 수도

국내 OTT 스타트업 왓챠는 대기업에 매각 의사를 타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왓챠는 올해 상반기 1000억원 이상 투자가 불발됐다. 2개월 전 긴급히 38억원 규모 투자금을 유치하긴 했지만 사업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최소 1000억원 이상의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왓챠가 자본잠식 상태라 선뜻 큰돈을 내놓을 투자자를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스타트업들의 폐업과 헐값 매각도 잇따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올 들어 10월 말까지 진행된 스타트업 인수합병(M&A)은 총 113건으로 이미 100건을 넘어섰다. 지난 7월에는 한 달 새 23건의 M&A가 집중적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내년에도 스타트업 업계의 상황이 나아지긴 힘들 전망이다. 벤처 펀드에 정부가 출자하는 모태펀드 예산이 올해 5200억원에서 내년 3135억원으로 39.7% 감소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업계로 흘러가는 정부 자금마저 줄어드는 것이다. 한 투자심사역은 “최근 스타트업들의 돈줄이 마르니, 자금 여유가 있는 기업들이 헐값으로 50% 이상의 지분을 인수해가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며 “내년 상반기가 되면 더 많은 매물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