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테크 기업이 몰려있는 미 실리콘밸리에는 인도계가 넘쳐난다.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트위터의 파라그 아그라왈, IBM의 아르비드 크리슈나, 어도비의 샨타누 나라옌,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등 테크 기업 수장들도 인도계다. 구글·애플·페이스북 등 빅테크 기업에서 인도계 직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30% 정도로 알려졌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구글

실리콘밸리의 인도계 비중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최근 세계 최대 검색엔진 기업인 구글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인도의 신분차별 제도인 카스트 제도가 구글 내부에 암암리에 작동한 것이다. 카스트 제도는 인도에서 법적으론 금지됐지만 여전히 인도 사회 전반에 남아있다.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엔 다양한 인종이 섞여 일하며 평등의 가치를 중요시하는데, 워낙 인도계 직원이 많다보니 같은 인도계끼리 카스트 제도를 기반으로 차별이 벌어지는 상황이다.

◇카스트 차별 반대 강연 취소한 구글

2일(현지시각) 워싱턴포스트는 구글에서 카스트 제도 차별에 대해 진행될 예정이던 외부인사 강연이 반발에 부딪혀 취소됐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일컫는 달리트 계급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단체 ‘이퀄리티 랩스(평등연구소)’의 창립자 덴모지 사운다라라잔 선임디렉터는 지난 4월 구글 뉴스 조직 직원들 앞에서 강연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강연은 인도계 직원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일부 인도계 직원들은 사운다라라잔이 반힌두적이며, 힌두교 혐오자라는 가짜뉴스를 만들어 구글 사내 인트라넷에 유포했다. 또 수천명의 직원에게 가짜뉴스를 담은 이메일을 보냈다. 힌두교는 인도의 토착 신앙과 브라만교가 융합된 인도의 민족 종교다. 이퀄리티 랩스 측은 카스트 제도에서 상위 계층인 구글 직원들이 인도의 최하층인 달리트 계급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강연을 강하게 반대한 것으로 본다.

'이퀄리티 랩스(평등연구소)’의 창립자 덴모지 사운다라라잔 선임디렉터. /이퀄리티 랩스

직원들의 반발에 구글은 결국 해당 강연을 취소했다. 사운다라라잔은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에게 직접 ‘강연을 강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순다르 피차이는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브라만 계급이다.

강연이 취소된 후 구글은 강한 후폭풍에 휩싸였다. 해당 강연을 주최한 타누자 굽타 구글 뉴스 선임 매니저는 1일 구글 내부에 ‘직장이 다양성·평등성 가치와 충돌할 때, 그리고 구글이 조직을 위해 여성을 희생시키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돌리고 사표를 제출했다. 굽타는 입장문에서, “구글 내부에서는 카스트로 인해 차별을 받으면서도 보복이 두려워 입장을 밝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며 “보복은 내부 비판을 처리하는 구글의 일상적인 관행”이라고 했다. 사실상 구글이 조직 내 카스트 제도로 인한 차별을 방관하고 있고, 이를 토대로 문제를 제기할 시 보복을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구글에서의 내 경력은 카스트 차별에 대한 회사 측의 의도된 방관, 다양성·평등성 프로그램에 대한 이중잣대, 책임을 피하기 위한 비밀주의, 차별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화된 보복 관행 때문에 끝이 났다”고 했다. 또 “이번 사태의 진짜 피해자는 강연을 하지 못한 사운다라라잔과 매일 카스트 차별을 당하지만 이를 발설 시 비자를 박탈당하거나 증오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것이 두려워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구글 측은 반발했다. 새넌 뉴베리 구글 대변인은 “구글은 직장 내 보복과 차별에 대한 매우 명확하고 공개적인 정책을 갖고 있다”며 “구글엔 카스트 차별이 설 자리가 없다”고 했다. 구글은 또 “해당 강연이 구글 직원을 하나로 모으고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 아닌 갈등을 부추기는 것으로 판단해 취소했다”고 했다.

구글 내 카스트 차별을 비판한 타누자 굽타 구글 뉴스 선임 매니저. /타누자 굽타 트위터 캡처

◇실리콘밸리에 암암리 작동하는 카스트

사실 인도인이 많은 실리콘밸리에서 카스트 제도를 기반으로 한 인도인 간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인도계끼리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힘을 키우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카스트 제도를 기반으로 여전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실리콘밸리에 나온 인도계는 인도에서도 나름 상위 계층인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낮은 계급인 달리트 인도계를 보면 ‘이들은 우리랑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 사례가 있다”고 했다. 테크 기업의 채용 인터뷰를 갔다가 인도계 감독관을 만났는데, 카스트 제도 하에서 낮은 달리트 계급인 것을 알고는 분위기가 한순간에 달라지고 입사에도 실패했다는 사례도 있다.

한 인도계 테크 직원은 미 온라인 매체 바이스에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낮은 계급임이 드러나면 같은 인도계 동료들은 더는 함께 점심을 먹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이러한 차별을 피하기 위해 실제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인도인의 성을 보면 해당 인물의 카스트 계급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0년 7월 미 캘리포니아 공정고용주택부는 인도계 직원 1명을 대표해, 직장 내 카스트 차별을 한 다른 인도계 직원 2명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네트워크 장비 기업 시스코에 다니는 한 인도계 A 직원이 인도계 매니저 밑에서 일을 했는데, 카스트 차별을 받았다는 것이다. 상사는 인도 뭄바이에서 자란 상위 카스트 출신이었고, A는 가장 낮은 달리트 계급이었다. 둘다 인도공과대학을 나왔지만 상사는 A의 계급이 낮다는 이유로 차별했다. 다른 상위 카스트 계급 인도인들 앞에서 A를 비웃었고, A가 실력은 없는데 인도 내 소수자 우대 정책의 혜택을 봐 인도공과대학을 진학했다고 했다. A는 “팀원들로부터 소외당했고, 업무 평가를 정당하게 받지 못했고 보너스도 제외됐다”고 주장했다.

해당 소송이 제기되자, 구글·페이스북·애플·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며 알게 모르게 차별받던 달리트 계급 직원 250여명이 “나도 차별을 당했다”며 경험담을 공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