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 스타트업 총 투자액이 12조원을 넘기며 ‘월 투자 1조원’ 시대가 열렸다. 2000년대 초반 IT 벤처 붐에 이어 제2 벤처 붐이 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호황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올해 들어 미국발 금리 인상 예고가 주식시장을 얼어붙게 만들면서 글로벌 스타트업 투자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글로벌 투자사들은 최근 투자 기업 가치를 낮추고 있으며, 앞으로 스타트업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미국발 기술주 쇼크가 올해 국내 스타트업 투자 시장에 미칠 영향은 어떨까. 국내 유력 벤처캐피털 대표 9명에게 올해 투자 시장 전망과 주목하는 분야를 물었다. 이들은 “글로벌 시장은 조정 가능성이 있겠으나 국내 스타트업 시장은 계속 성장을 이어갈 것”이라며 “올해는 블록체인·NFT·헬스케어 분야를 주목하겠다”고 했다.

◇VC 대표 9명 중 8명, 제2 벤처 붐 올해도 간다

벤처캐피털 대표 9명 중 알토스벤처스의 김한준 대표를 제외한 8명은 올해도 지난해 못지않은 투자 호황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소프트뱅크 그룹의 글로벌 벤처투자를 총괄하는 소프트뱅크벤처스의 이준표 대표는 “글로벌을 무대로 하는 한국 기업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기술적으로도 우수한 기업들의 도전이 계속되고 있다”며 “우리도 한국 기업 투자 비중을 늘리겠다”고 했다. 정신아 카카오벤처스 대표도 “올해도 제2 벤처 붐이 계속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했다. 기존 민간 투자사와 정부 자금뿐 아니라 대기업과 금융사, 심지어 언론사까지 벤처캐피털을 만들어 투자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승운 스톤브릿지벤처스 대표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혁신할 분야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어 투자의 큰 흐름은 계속 좋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의 투자 붐이 2000년대 초반 IT 버블 상황과는 다르다는 진단이 많았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을 맡고있는 지성배 IMM인베스트먼트 대표는 “기업과 투자사 모두 아마추어 같았던 20년 전 제1 벤처 붐과는 다르다”며 “이젠 우수한 기업의 인재뿐 아니라 자본도 성숙해져 올해도 지난해와 비슷한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도 “기업들의 역량과 기술이 닷컴버블 시기와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단기적 투자 조정기 올 수도

투자사 대표들 사이에서는 투자 총액은 계속 성장하겠지만, 기업 가치를 보수적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남기문 스마일게이트벤처스 대표는 “시장에 돈이 많이 풀려 스타트업 가치가 높다는 우려가 거론되는 만큼, 단기적인 조정기를 거칠 것”이라고 했다. 하나금융그룹의 CVC(기업형 벤처캐피털)을 이끌고 있는 김동환 하나벤처스 대표도 “지난해까지는 투자를 쉽게 했다면, 올해는 많은 벤처캐피털들이 진짜 실력을 보여 옥석을 가려내야 하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투자사 대표들은 미국의 기술주 약세 현상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최근 나스닥에 상장한 메타버스·전기차·AI(인공지능)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하고, 이로 인해 기업공개(IPO) 시장까지 얼어붙으면서 기업과 투자사들의 엑시트(매각 또는 상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준표 대표는 “글로벌 벤처캐피털 중 일부는 이미 기업가치 조정에 들어갔고, 이 흐름이 지속되면 초기 투자 시장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며 “조정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알토스벤처스의 김한준 대표는 “향후 시장은 꽤 혼란스러울 것 같다”며 “자금 조달 시장은 위축과 과열을 반복하며 변동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블록체인·헬스케어에 주목”

이들이 꼽은 올해 유망 분야는 어디일까. 최근 IT업계와 게임업계가 앞다퉈 뛰어드는 블록체인, 가상 화폐와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를 유망 분야로 꼽은 사람들이 많았다. 박기호 대표는 “우리를 비롯해 많은 국내 투자사들이 블록체인, 가상 화폐 분야에 보수적이었는데 이젠 실제 현실 세계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들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했다. 지성배 대표도 “이제는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국내 대표 IT 기업인 네이버와 카카오의 초기 투자를 이끄는 수장들도 블록체인과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를 꼽았다. 네이버의 초기 투자를 총괄하는 양상환 D2SF 센터장은 “블록체인과 메타버스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며 “네이버의 다양한 서비스와 시너지를 내는 쪽으로 투자할 것”이라고 했다. 김동환 대표는 기업 고객을 노리는 구독형 소프트웨어, 유승운 대표는 디지털 치료제를 올해 눈여겨보는 투자 분야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