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2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SK하이닉스의 중국 장쑤성 우시(無錫) D램 공장 첨단화 계획이 미국의 대중(對中) 제재로 좌초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우시 공장은 SK하이닉스 D램 생산량의 50%, 전 세계 D램 생산량의 15%를 차지하는 핵심 시설이다. 중국에 첨단 생산 시설을 두고 있는 한국 기업들이 격화되는 미·중 테크 전쟁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것이다.

SK 하이닉스

로이터통신은 18일 “SK하이닉스가 우시 공장에 첨단 반도체 생산을 위한 극자외선 노광장비(EUV)를 도입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미국의 제동으로 무산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미 백악관 관계자 등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조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이 자국 군(軍) 현대화의 핵심인 최첨단 반도체 개발에 미국과 동맹국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막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했다. 실리콘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를 그려 넣는 장비인 EUV는 차세대 D램 생산의 핵심 장비로 네덜란드 회사 ASML이 독점 생산하고 있다. 현재 네덜란드 정부는 미국의 요구로 EUV 장비의 중국 수출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우시 공장 첨단화가 장비 도입 문제로 차질을 빚을 경우 SK하이닉스의 경쟁력 약화는 물론,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장비 도입 못 하면 경쟁 뒤처져

로이터통신은 “미국 정부는 첨단 장비를 중국에 도입하려는 SK하이닉스의 노력을 중국 기업이 장비를 도입하려는 노력과 달리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중국에 장비를 설치하면 중국은 언제든 그것을 차지할 수 있고 중국의 능력이 된다”고 했다. 미국 정부가 중국 내에 첨단 장비가 도입되는 것 자체가 미국에 대한 위협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SK하이닉스는 당분간 우시 공장에 EUV 장비 설치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EUV 공정은 올해 처음 D램을 양산할 정도로 초기 단계”라며 “중국 공장까지 이 공정을 적용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그래픽=양인성

하지만 미·중 테크 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걸림돌이다. SK하이닉스는 이천 공장에서 최신 D램 공정을 테스트한 뒤 양산을 시작하면, 통상 6개월에서 1년 뒤에 우시 공장에 새 공정을 순차적으로 적용해왔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1~2년 뒤에는 우시 공장에도 EUV 공정을 적용해야 한다. 삼성전자와 미국 마이크론이 EUV 공정 도입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우시 공장에 EUV 장비를 도입하지 못할 경우 SK하이닉스는 순식간에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 현재 SK하이닉스는 글로벌 D램 시장에서 올 3분기 기준 27.2% 점유율로 삼성전자(44.0%)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3위 마이크론(22.9%)과의 격차가 크지 않다. 무엇보다 삼성전자와 미국 마이크론은 중국에서 D램 공장을 운영하지 않고 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D램 반도체는 초미세 공정으로 갈수록 전력 효율과 성능이 급속도로 개선된다”면서 “조금이라도 앞선 기술을 가진 업체에 수요가 집중되기 때문에 한번 투자 시기를 놓치면 따라잡기 힘들다”고 말했다.

◇미국 발 맞추는 일본도 위협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는 미국의 대중 제재로 SK하이닉스 이외의 국내 기업에도 불똥이 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西安) 공장에서 낸드플래시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낸드플래시는 D램보다는 구형 장비를 사용하기 때문에 당장 미국의 대중 제재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며 “하지만 수년 뒤에는 낸드플래시 역시 EUV 장비 도입이 불가피하고, 미국이 구형 장비의 중국 반입까지 금지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대중 제재에 동조하는 일본이 한국 기업의 새로운 위협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는 “일본은 최근 중국산 통신 장비 도입을 막는 법안을 추진할 정도로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면서 “일본이 자국산 반도체 소재와 화학약품, 장비 등의 중국 반입을 막을 경우 한국 기업들에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