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서, 1999년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왔다. 실리콘밸리에서 ‘Sazze(사제)’라는 스타트업을 창업해 22년간 경영하고 있다. 치열함 끝에 어느 정도의 결실을 거뒀고, 8년 전부터는 벤처캐피탈(VC)의 길로 뛰어들었다. 나와 같은 시도를 하는 한인 창업자에게 투자하며 멘토링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사업하며 수많은 벽에 부딪혔다. 미국에도 엄연한 유리천장(Glass ceiling)이 있다. 학연, 지연, 혈연, 인맥 등 보이지 않는 사업의 장애물들이 존재한다. 사업 아이템과 성과만으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평등’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다고 느낀 때도 잦다.

미 실리콘밸리 쿠퍼티노에 있는 애플 본사. /언스플래시 칼 라바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인종은 인도계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에 근무하는 인도계 직원의 비중이 30% 정도에 달한다.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IBM의 아르빈드 크리슈나 등 빅테크 기업의 CEO 역시 인도계가 많다. 인도를 비롯해 이스라엘, 중국, 이란계 사람들은 스타트업과 정치, 투자, 회계 등 각 분야에서 서로를 도와준다. 한 이스라엘 기업인에게 “제품의 품질이 부족해도 이스라엘 제품이라서 계속 쓴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고, 창업한 한인들은 “정말 똑똑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한편 씁쓸하게도 “미국에서 절대 믿지 말고 같이 사업도 하면 안 되는 사람이 한인이다”라는 얘기도 공공연히 들린다. 미국이라는 큰 땅덩어리에서 생존과 성공을 위해 같은 한인끼리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도 모자랄 상황에 ‘제일 믿지 못한 부류’로 표현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벤처캐피탈리스트의 길에 접어든 후 실리콘밸리에 한인 창업자 모임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82스타트업 작년 1월 진행한 82스타트업 써밋 행사. 실리콘밸리의 한인 창업자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3년 전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미국의 한인 창업자들과 저녁 식사를 했는데, 9명이 모인 그 자리가 시작이었다. 모두가 스타트업을 하면서 힘들다는 고충을 털어놨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번째 모임으로 이어졌고 모임은 20명 규모로 커졌다. 한국의 국가번호 82를 따서 ‘82스타트업’이라는 모임 이름도 지었다. 2020년 1월에는 약 300명이 참가한 써밋 행사를 진행했다.

3년째 이어오는 82스타트업은 이제 개인적인 친분 모임을 넘어 미국과 한국에서 사업을 전개하는 창업자의 멘토링 프로그램, 북클럽과 써밋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서로의 성장을 돕는 곳이 됐다. 비영리 단체로 운영되는 만큼 선배 창업자들이 후배 창업자를 돕는 모든 활동은 재능 기부다. 82스타트업의 슬로건은 ‘Pay it Forward(선행 실천하기)’다. 성공을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경험했던 한인 선배 창업자가 후배 창업자를 도와주려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기하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대표

작년부터는 좀 더 실제적인 지원 행사를 열고 있다. 성공한 한인 선배 창업가와 후배 창업가를 연결하는 것이다. 바로 액셀러레이터(가속장치)다. 작년 12월 제1회 82스타트업 글로벌 액셀러레이터를 개최했다. 지금은 유니콘(비상장이면서 기업 가치 1조원 이상인 스타트업)이 된 센드버드의 김동신 대표, 업무협업툴 기업 스윗의 이주환 대표, 직장인 사이에 유명한 블라인드의 문성욱 대표, 서빙 로봇 개발 스타트업 베어로보틱스의 하정우 대표 등 14명의 성공한 한인 창업가들이 흔쾌히 멘토로 나섰다. 당시 100개 이상의 팀이 지원했고, 19팀이 선발됐다. 6주간 진행된 멘토링에서는 선배 창업가들은 미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을 운영하며 경험한 노하우와 그동안 받았던 격려의 힘을 후배들에게 고스란히 나눠줬다.

코로나 사태로 얼룩진 올해도 제2회 82스타트업 글로벌 액셀러레이터를 개최한다. 한국과 미국을 기반으로 사업하고, 글로벌 확장을 계획하는 초기 스타트업(시리즈 A 이전 단계)이 대상이다. 현재 신청을 받고 있고, 11월 2일 13개 팀을 선발할 예정이다. 올해는 판이 더 크다. 롯데벤처스의 후원으로 5억원의 상금도 준다. 1등 3팀에겐 각각 1억원, 나머지 10팀은 각각 2000만원을 지급한다.

/82스타트업 제2회 82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에서 멘토로 나서는 한인 창업자들.

올해도 페이 잇 포워드 정신을 갖고 김창원 타파스미디어 대표, 김동신 센드버드 대표, 안익진 몰로코 대표, 한킴 알토스벤처스 대표, 이누마의 이수인 대표 등이 멘토로 나선다. 6주간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참가한 13개 스타트업들은 12월17일 데모데이를 한다. 상위 4개 팀은 총 1억여원의 별도 상금을 준다. 선발팀은 롯데벤처스 후원을 통해 내년 실리콘밸리 현장 투어 혜택을 준다. 롯데벤처스, 한화드림플러스, 디캠프, 프라이머사제 등에서도 후속 투자를 적극 검토할 예정이다.

최근 한인 스타트업들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센드버드, 몰로코는 올 상반기 유니콘이 됐다. 팀 황이 창업한 피스컬노트도 현재 1억4000만달러 가치로 IPO(상장)를 준비하고 있고, 건강관리 앱 눔(NOOM)도 5조원 정도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아 상장을 준비 중이다. 10~20년 전 규모가 작았던 구글이나 아마존, 페이스북 등이 짧은 시간에 혁신을 거듭하며 거대 ‘공룡’이 된 것처럼, 한국 스타트업들도 폭풍 성장하고 있다. 이렇게 성공하는 선배들의 노하우와 경험이 글로벌 무대에 새롭게 도전하는 후배 창업자들에게 큰 밑거름이 되는 작업들을 계속 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