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통신 장비 기업 에릭슨은 최근 미국 1위 통신 업체 버라이즌과 83억달러(약 9조6000억원) 규모의 5G(5세대 이동통신) 장비 공급 계약을 맺었다. 뵈리에 에크홀름 에릭슨 최고경영자(CEO)는 “에릭슨은 북미에서 5G 성공의 길을 계속 걷고 있다”며 “이번 계약은 에릭슨 역사상 단일 거래 중 최대 규모”라고 말했다. 지난해 버라이즌과 8조원어치 5G 장비 납품 계약을 체결했던 삼성전자도 이번 입찰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에릭슨에 밀렸다. 삼성전자는 앞서 지난 1월과 3월에 각각 진행된 미 통신 업체 T모바일과 AT&T의 5G 장비 사업자 선정에서도 노키아, 에릭슨에 밀려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삼성전자의 5G 통신 장비 사업에 ‘빨간불’이 켜졌다. 세계 1위 통신 장비 업체 중국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제재로 삼성전자가 그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이 무성했지만, 정작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은 추락하고 있다.

◇삼성의 신수종 사업 5G, 글로벌 5위에 그쳐

5G 통신 사업은 삼성그룹이 대표적인 미래 먹거리로 꼽고 있는 사업이다. 삼성은 2018년 AI(인공지능)·바이오·전장(자동차 전자 장치)과 함께 5G를 4대 미래 성장 사업으로 선정했다. 당시 삼성은 ‘세계 최초 5G 상용화를 계기로 반도체·스마트폰·장비 등 전 분야에 과감한 투자와 혁신을 주도해 글로벌 시장에서 도약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특히 5G는 자율 주행, IoT(사물인터넷), 로봇, 스마트 시티 등 다양한 신산업과 밀접하게 연결돼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2019년 1월 5G 네트워크 통신 장비 생산 라인 가동식에 참석해 “새롭게 열리는 5G 시장에서 도전자의 자세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며 힘을 실었다.

/그래픽=김현국

초기에는 가시적인 성과가 이어졌다. 2019년 4월 한국에서 세계 최초 5G 상용화에 성공했고, 삼성전자는 SKT와 KT 등 국내 통신사들과 5G 네트워크 장비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시장 선점 효과로 2019년 1분기 삼성전자의 5G 장비 시장점유율은 37.8%로, 반짝 세계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게다가 미국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화웨이 제재’에 착수하자 삼성전자가 반사이익을 누리며 20%의 시장점유율을 달성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그러나 전 세계 5G 사업이 본격화하자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은 갈수록 곤두박질치고 있다. 작년 2분기부터는 10%대 점유율마저 무너져 한 자릿수를 기록 중이다. 삼성전자는 올 들어 일본·유럽의 1위 통신 업체인 NTT도코모, 보다폰과 장비 공급 계약을 체결했지만 점유율을 끌어올리기엔 미미한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고한 화웨이, 선전하는 에릭슨·노키아

통신 업계에서는 4세대 이동통신(LTE)까지 장비 산업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삼성전자가 오랜 노하우와 특허 경쟁력, 규모의 경제를 앞세운 화웨이·에릭슨·노키아를 갑자기 뛰어넘기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화웨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5G 보급 속도를 자랑하는 중국 시장에서의 탄탄한 점유율을 바탕으로 여전히 세계 시장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지난해 5G에 약 30조원 가까이를 투자한 중국 통신 업체들은 올 4월 기준 약 3억명이 넘는 5G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올 연말 전 세계 5G 가입자가 5억8000만명, 이 중 중국 사용자는 4억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국에서만 5G 장비를 공급하는 ZTE도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10%로 삼성전자보다 크게 앞설 정도이다.

미국·유럽 시장에서는 기존 업체인 에릭슨·노키아가 선전하고 있다. 후발 주자인 삼성전자는 이들의 높은 기술 장벽과 오랜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부재도 삼성의 5G 경쟁력 약화 요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전자 업계 한 고위 임원은 “통신 장비는 국가의 주요 인프라이고, 한번 설치하면 10년 가까이 장기간 사용하기 때문에 비즈니스 신뢰 관계가 상당히 중요하다”며 “삼성전자가 지난해 미국 버라이즌과 사상 최대 규모의 수주 계약을 따낸 배경에는 이 회사 최고 경영진과 오랜 친분이 있었던 이 부회장의 역할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