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의 금융 서비스인 카카오페이증권의 증권 계좌는 400만개가 넘는다. 지난해 3월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1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 달성한 수치다. 증권 업계 3위인 한국투자증권이 15년 만인 올 3월 400만 계좌를 돌파한 것과 비교하면 무시무시한 속도다. 쇼핑이나 택시 결제를 하고 남는 잔돈을 투자해주는 카카오페이 펀드 계좌는 190만개에 이른다. 금융 스타트업 토스가 지난 3월 출범한 토스증권은 두 달 만에 300만 계좌를 돌파했다.

카카오, 네이버, 토스 같은 IT 기업들의 금융 서비스인 ‘테크핀(TechFin)’이 은행과 증권사들의 금융 권력에 균열을 내고 있다. 국내 금융 서비스 사용자들이 테크핀 모바일 앱을 여는 횟수는 1인당 월 225회로 하루 7번이 넘는다. 은행 앱의 9배 수준이다. 몸값도 거침없이 오르고 있다. 올 하반기 상장을 앞둔 카카오뱅크의 예상 기업가치는 40조원 이상으로 국내 최대 은행인 KB금융(24조원)의 두 배에 육박한다. 간편 송금·결제 서비스로 성장한 금융 스타트업 토스는 기업가치 11조원으로 2018년 1조3000억원에서 10배나 급등하면서 우리은행(8조)을 뛰어넘었다.

테크핀 기업들은 기존 금융 기업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계좌 개설과 투자가 비대면으로 이뤄지는 것은 물론 해지·해약도 모바일 앱 터치 몇 번이면 가능하다. 조건만 입력하면 몇 분 내에 금융 상품 수십 가지를 추천해준다. 금융 업체들이 쌓아온 안정과 신뢰라는 무기를 데이터와 편리함을 앞세워 단숨에 뛰어넘었다.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에서는 차량 공유 업체 고젝과 그랩이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중국에서는 알리바바와 텐센트가 모바일 금융 거래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이창용 서강대 기술경영대학원 교수는 “테크핀 기업들의 성장이 은행의 존재를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카뱅 몸값 40조, KB금융 2배… 토스, 42초면 대출심사

테크핀(TechFin) 서비스 토스에서는 42초면 시중은행 대출 창구를 모두 다녀올 수 있다. 토스 앱에서 ‘대출 조회’ 버튼을 누르고 직장 정보와 소득만 입력하면 ’42초 만에 30개 은행에 다녀왔어요'라는 알림과 함께 대출 한도가 크고 이율이 낮은 조건순으로 대출 상품들을 보여준다. 지난달까지 누적 심사 요청 158만건, 누적 대출 실행 금액은 3조원이 넘는다. 카카오페이증권에서는 잔돈으로 펀드 투자를 골라서 할 수 있다. 카카오택시나 카카오쇼핑에서 결제한 뒤 남은 1000원 미만의 잔돈을 카카오페이가 알아서 유망 펀드에 적립한다. 지난 4월까지 가입 계좌가 누적 188만개로 증권사 공모펀드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투자하고 있다.

그래픽=양인성

◇금융시장 상식 깬 테크핀

토스와 카카오페이의 사례처럼 테크핀 기업들은 기존 금융권의 상식을 깨면서 급성장하고 있다. 고객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은행과 협업을 꺼리고, 안정적인 운용을 중시하는 기존 금융권과 달리 테크핀 기업들은 타사 상품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데이터를 기반으로 고객을 세분화한 맞춤형 상품도 공격적으로 출시한다. 카카오뱅크의 대표적인 히트상품 ’26주 적금'은 일정액을 납입하는 기존 적금과 달리 매주 납입액을 전주보다 많이 넣도록 하고, 특정한 주에는 가산금리를 주면서 10대와 사회 초년생들의 호응을 얻었다. 젊은 층의 도전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 금융 서비스 가입에 효과적이라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상품이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각각 검색과 메신저 시장에서의 독점적인 경쟁력을 앞세워 금융시장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다. 검색과 채팅을 이용하던 이용자들이 두 회사가 선보이는 쇼핑·결제·투자·증권·대출 서비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IT 업계 관계자는 “은행을 찾아가 상담을 받거나 투자 상품을 일일이 찾아볼 필요 없이 원래 이용하던 포털이나 메신저를 열면 더 편하게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며 “적립이나 멤버십 같은 혜택까지 받기 때문에 이용자들의 충성도가 갈수록 높아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카카오페이 가입자는 3600만명에 이르고, 카카오뱅크는 월 1635만명이 이용하는 국내 1위 은행앱이다. 카카오뱅크는 2019년 137억원이던 연간 이익이 지난해 1136억원으로 늘었다. 네이버는 네이버페이와 쇼핑 서비스의 시너지를 톡톡히 보고 있다. 지난해 쇼핑 거래액이 28조원으로 인터넷 쇼핑 시장에서 독보적 1위다. 네이버는 기존 금융권에 없는 소상공인 맞춤형 금융 서비스까지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간편송금으로 시작한 토스는 증권에 진출했고, 하반기에는 은행도 선보인다. 토스에 계좌와 카드를 등록한 사업자는 약 1000만명, 계좌 연동수만 3100만건에 달한다.

◇중국·동남아에선 은행 이상

플랫폼을 기반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국내 테크핀 기업들의 전략은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검증된 방식이다. 알리바바의 알리페이와 텐센트의 위챗페이는 중국인 90%가 사용하는 모바일 메신저를 기반으로 은행에 갈 필요 없이 아예 페이 서비스를 은행계좌처럼 활용하게 만들었다. 현재 두 서비스의 활성 사용자는 10억명, 2019년 기준 결제액은 16조달러에 이른다. 알리페이에 고객이 충전해놓은 금액을 투자하는 마켓펀드 ‘위어바오’는 2019년 기준 2조1000억위안으로 세계 최대 규모 펀드가 됐다. 특히 알리페이에 가입한 고객 중 상당수는 자동차보험·건강보험 등도 알리바바의 상품을 이용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인구의 70%가 은행계좌가 없고, 자산 대부분이 현금인 동남아에서도 테크핀 기업들이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차량 공유 업체 고젝은 지난달 14일 전자상거래 업체 토코피디아를 합병하면서 은행과 자산관리, 대출까지 제공하는 ‘고투그룹’이라는 거대 금융회사가 됐다. 고투그룹의 월 이용자는 1억명이 넘고, 인도네시아 전체 GDP의 2%를 차지한다. 기업가치가 400억달러로 추산된다. 고젝은 자동차·오토바이 공유에 활용하는 결제 시스템인 고페이를 쇼핑과 상거래 등으로 확장하면서 이용자수를 급격히 늘렸다. 싱가포르의 차량 공유 업체 그랩도 간편결제 서비스 그랩페이로 사용자를 모은 뒤 은행, 보험, 증권 등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인구 6억5000만명에 이르는 동남아 각국에 진출했다. 테크핀 서비스가 본격화되며 그랩을 운영하는 ‘씨’그룹의 주가는 지난 1년간 400%나 올랐다.

☞핀테크와 테크핀

은행·카드사 같은 금융기관이 모바일 뱅킹, 간편 송금 같은 은행 업무를 간편하게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핀테크(FinTech)라면, 카카오·네이버·토스 같은 IT 기업이 독자 기술로 종전에 없던 금융 서비스를 만들어낸 것이 테크핀(TechFin)이다. 2016년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이 처음 써 널리 알려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