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 파워로 무장한 스타트업들이 한국 산업계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29일 경기도 분당에 있는 반도체 설계회사 ‘세미파이브’ 사무실에서 조명현 대표가 클라우드(대형 서버)용 인공지능 반도체 설계도 앞에 섰다. 그가 손에 든 것은 테스트 중인 반도체칩이다. 창업 2년도 안 돼 431억원을 투자받은 세미파이브 사무실에는 ‘우리가 맞춤형 칩의 새로운 허브다’라는 슬로건이 적혀 있다. 조 대표는 “이 거대한 반도체 산업을 우리 힘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지난달 29일 경기도 분당 코리아디자인센터에 위치한 반도체 설계 회사 ‘세미파이브’ 본사. 재택근무로 비어있는 책상 곳곳에 반도체가 꽂힌 갖가지 크기의 전자기판이 컴퓨터와 연결된 채 놓여 있었다. 조명현(41) 세미파이브 대표는 “직원들이 우리가 설계한 데이터센터용 인공지능(AI) 반도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원격으로 테스트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미파이브는 2019년 5월 설립해 2년도 되지 않은 신생 업체이지만 현재 한국 스타트업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반도체 설계 회사다. 고객이 원하는 맞춤형 반도체를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제공하는 게 경쟁력이다.

◇반도체 설계 기간 3분의 1, 비용 절반으로 혁신

조 대표는 미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CPU(중앙처리장치) 설계로 석·박사 학위를 받고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5년간 반도체 담당으로 일했다. 그는 반도체 컨설팅을 하면서 설계 과정에 비효율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창업을 결심했다.

조 대표는 “인공지능, 로봇, 자율주행차 등 기존 반도체가 성능을 발휘하기 어려운 분야가 등장하면서 스마트폰 제조사, 통신 업체까지 자체 반도체 개발에 나서고 있다”면서 “문제는 반도체의 기본 토대를 만드는 데 너무 많은 자원이 낭비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용도가 달라도 전원 연결 구조, 데이터가 오가는 회로 등 반도체 설계의 80%는 똑같은 작업인데, 각 회사들이 모두 백지 상태에서 반도체 설계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세미파이브는 주문이 들어오면 자체 반도체 설계 시스템을 재가공해 뼈대를 쌓고, 고객이 요구한 기능만 추가해 맞춤형 반도체를 완성한 뒤 삼성전자 같은 제조 전문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에 연결해준다. 반도체 전력 효율과 배치를 자동으로 최적화하는 소프트웨어도 개발했다. 조 대표는 “9~12개월 걸리던 반도체 주문 설계 기간을 3개월로 단축하고 비용은 절반으로 줄였다”면서 “누구나 원하는 반도체를 온라인 쇼핑하듯이 구매할 수 있는 시대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세미파이브처럼 한국 산업의 취약점인 ‘소프트(soft) 파워’를 채워줄 스타트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하드웨어와 제조업 중심인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영역이다. 하지만 독특한 아이디어와 뛰어난 기술력을 겸비한 젊은 창업자들이 뛰어들면서 이들이 한국 산업의 체질까지 바꿔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김창경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교수는 “소프트 파워 스타트업이 기존 대기업이 할 수 없는 부분을 채워준다면 한국의 산업 경쟁력이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BMW·볼보가 매달린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전 세계 자동차 업계의 이목이 집중된 소프트 스타트업도 있다. 자율주행차의 ‘눈’ 역할을 하는 3차원 센서 라이다(LiDAR)용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서울로보틱스가 주인공이다. 서울로보틱스의 프로그램은 BMW·볼보의 자율주행차에 사용된다. 지난달 30일 찾은 서울 서초구의 서울로보틱스 사무실에는 국내외 업체들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며 보내온 라이다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기계공학과 출신 이한빈(30) 대표는 “라이다에 입력된 차량 주변 사물의 크기와 속도를 분석하는 소프트웨어가 제 역할을 해야 완벽한 자율주행이 가능하다”면서 “이 기술은 우리가 국제 표준”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졸업 후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자율주행 코딩 경진대회에서 2000여 팀 가운데 라이다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실리콘밸리의 한 대기업이 연봉 6억원을 제시하며 스카우트 제의를 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2017년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 대표는 “라이다는 자율주행차 외에 스마트 공장, 보안 시스템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면서 “우리 라이다 운영체제를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처럼 누구나 쓸 수밖에 없는 표준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1980년생 이주환 대표가 창업한 스윗은 구글·세일즈포스(슬랙)·마이크로소프트 등 거대 IT기업들이 장악한 업무용 협업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협업 소프트웨어는 채팅, 이메일, 문서, 콘퍼런스콜, 캘린더 등 업무용 프로그램을 한데 묶은 것으로 코로나 시대에 가장 유망한 소프트웨어 시장으로 꼽힌다. 스윗은 지난해 2월 세계 최대 스타트업 커뮤니티 ‘스타트업 그라인드’ 행사에서 최고상인 ‘올해의 성장 스타트업’에 선정됐다. 이 대표는 “서비스 안정성 지표에서 경쟁 서비스는 97~99% 수준인데, 스윗은 99.9999%로 평가받았다”면서 “고객사가 늘면서 매출이 매달 30%씩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휴이노는 한국에선 불모지로 꼽히는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 ‘1호 신화’를 쓰고 있다. 휴이노는 웨어러블(착용형) 기기에서 나온 생체 신호를 AI로 분석해 심장마비와 부정맥 등을 사전에 감지해내는 기술을 갖고 있다. 국내 최초 원격 모니터링 기술로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았고 의료보험도 적용된다. 유한양행, 신한캐피탈 등이 휴이노에 투자한 금액이 360억원에 이른다. 부산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출신인 길영준 휴이노 대표는 “우리 AI 기술을 이용하면 부정맥을 99% 이상 정확도로 잡아낼 수 있다”면서 “투자금으로 대규모 임상을 실시해 글로벌 시장에 본격 진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프트웨어와 바이오 기술을 결합해 반려동물 헬스케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핏펫도 두각을 나타내는 스타트업이다. 지난해 중소기업벤처부가 선정한 ‘아기 유니콘 기업’에 선정된 핏펫은 2018년 4억에 불과했던 매출이 지난해 300억에 달할 정도로 고성장을 거듭하며 국내 최고의 펫테크(Pet-tech)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두브레인은 AI 교육 혁명을 이끌 기업으로 주목받는다. 최예진(28) 대표를 비롯한 서울대생 3명이 2017년 창업한 두브레인은 발달 장애 아이들용 인지 학습 치료 소프트웨어를 만든다. 발달 장애 아이들이 모바일 기기를 이용해 게임하듯이 치료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유엔이 주최한 ‘도시 혁신가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는 “성공한 소프트 파워 스타트업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에서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한 산업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인식도 깨지고 있다”면서 “더 많은 사람이 도전하고 투자받는 선순환 생태계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