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타이베이시 타오위안 국제공항에 13일 낯선 중국발 화물 비행기가 내렸다. 비행기가 화물 터미널로 들어서자 노란색 작업 조끼를 입은 직원(화물탑재관리사) 수십명이 기다렸다는 듯 비행기에 화물을 싣기 시작했다.

자유시보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이 비행기는 중국 화웨이가 보낸 특별 화물기였다. 비행기에 실린 화물은 대만 반도체업체 TSMC가 생산한 최신 ‘기린 9000’ 스마트폰용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수백만개. 이 중엔 미처 품질 검수나 포장 절차를 거치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자유시보는 “화웨이는 전용 화물기를 한 번 띄우는데 700만대만달러(약 2억8300만원)를 쓰고 있다”고 했다.

화웨이가 반도체 등 첨단 부품 공급 중단을 이틀 앞두고 막판 부품 수급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미국은 15일부터 미국의 장비, 기술,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만든 모든 반도체를 미국 허가 없이 화웨이에 공급할 수 없게 했다. 화웨이는 현재 최장 6개월을 버틸 수 있는 부품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봉황망 등 중국 매체는 “화웨이에는 비장함마저 감돌고 있다”고 했다. 확보한 재고가 소진되면 화웨이의 스마트폰과 통신장비 사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화웨이 제재는 화웨이뿐만 아니라 세계 반도체 업계를 뒤흔들고 있다. 화웨이는 세계 2위 스마트폰 업체로, 지난해 2억4050만대의 스마트폰을 판매했다. 미국 퀄컴, 대만 TSMC, 한국 삼성전자 등 화웨이가 고객인 세계적 전자 기업들도 단기적으로 매출 타격을 입는다. 중국 언론사 신랑재경은 “세계 전자부품 공급망에 격랑을 일으킬 사건”이라고 했다.

◇떨고 있는 전 세계 반도체 업계

화웨이에 반도체를 공급하던 업체들도 노심초사하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미디어텍 등 전 세계 반도체 업체들은 미국 상무부에 화웨이와의 거래 허가 승인 요청을 한 상태다. 그러나 13일까지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미국이 거래 허가 승인을 내줄 가능성은 매우 작다”는 말이 나온다. 그만큼 미국의 태도가 강경하다는 것이다.

화웨이와 거래 중단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 대만 기업의 손실은 2조8000억엔(약 31조24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일본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은 전망했다. 한국 업체들은 총 13조원에 달하는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측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화웨이에 스마트폰용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를 판다. 삼성전자는 연간 전체 매출 중 3.2%에 해당하는 7조3700억원을, SK하이닉스는 연간 매출의 11.4%인 3조원을 화웨이에서 거두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부품업계도 떨고 있다. 일본은 화웨이 전체 부품 공급의 30%를 차지한다. 소니는 화웨이에 스마트폰 이미지센서를, 무라타제작소는 MLCC(적층세라믹콘덴서), 기옥시아는 메모리반도체를 화웨이에 판다. 화웨이에 연간 6조2000억원의 반도체를 생산해 파는 대만의 TSMC, 4200억원의 모바일 AP를 파는 미디어텍도 매출 감소가 불가피하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작년 화웨이가 미국 업체들로부터 수입한 부품은 187억달러(약 22조2000억원)에 달한다.

◇"단기적 타격이나 장기적 이익"

반도체 업체들은 화웨이와의 거래 중단으로 생기는 매출 감소를 메울 대체 거래처 확보에 뛰어들었다. 일본의 디스플레이 업체 JDI는 중국의 스마트폰 업체인 샤오미나 오포, 비보 등으로 공급선을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업체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업계 고위 임원은 “아직 드러난 움직임은 없지만, 향후 화웨이를 대체할 다른 업체에 공급을 늘리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화웨이와의 거래 중단이 단기적으로는 타격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내 업체에 이익이 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당장 “올해 3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사업 매출은 예년보다 좋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화웨이의 재고 확보 움직임에 따라 수출 물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화웨이의 빈자리를 중국의 중저가 브랜드와 애플·삼성전자 등이 차지하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전체 반도체 수요는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는 “중국 시장은 중국 브랜드가 화웨이의 중저가 라인업을 대체하고, 애플과 삼성전자가 화웨이의 플래그십(전략) 모델을 대신할 것”이라고 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업계 1·2위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센터 이사는 “화웨이가 시장에서 힘을 잃는다고 해도 연간 14억대라는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 수요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다른 업체가 부상해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메모리 반도체를 구입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