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상장 기업에 주주 환원과 경영 개선을 요구하는 행동주의 펀드들의 활동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여러 개의 펀드가 힘을 합쳐 회사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는 ‘행동주의 연합군’도 등장했다. 그간 펀드들이 각자 목표로 삼은 회사와 ‘일대일’ 싸움을 해 왔다면, 이젠 여러 펀드들이 뭉쳐 ‘다(多) 대 일’ 구도를 만드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에선 이른바 ‘벌떼 공격(swarm)’으로 불리는 행동주의 펀드의 단체 행동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2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담배 업체인 KT&G를 상대로 행동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는 사모펀드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는 다른 사모펀드 2곳과 함께 “다음 달 KT&G 주주총회에 ‘주주 환원 확대’ 등 의안을 상정해달라”는 취지의 소송을 지난 17일 국내 법원에 제기했다. KT&G 지분을 약 1% 보유한 플래쉬라이트 측이 작년부터 회사 경영 개선안을 제시했지만 KT&G 측이 거부하자, 이를 법적으로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플래쉬라이트는 글로벌 사모펀드 칼라일 출신인 이상현 대표가 이끌고 있다.

◇행동주의 사모펀드 3곳이 연합해 KT&G 상대 소송

증권가는 이번 소송에 플래쉬라이트와 함께 원고로 참여한 미국계 사모펀드 2곳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은 ‘화이트박스 멀티스트래티지 파트너스’와 ’판도라 셀렉트 파트너스’로, 각각 4조원·7000억여원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장기간 저평가돼 온 KT&G의 주주 가치를 상승시켜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고 플래쉬라이트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이 가진 KT&G 지분은 공개되지 않았다.

‘플래쉬라이트 연합’은 KT&G 측에 “그간 벌어놓은 현금성 자산을 주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회사는 작년 1주당 5000원을 배당금으로 나눠줬는데, 이들은 그 2배인 ‘주당 1만원’은 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플래쉬라이트 측은 “현재 회사가 쌓아 놓은 현금성 자산이 6조원 이상이기 때문에 충분히 감당 가능한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KT&G에서 인삼 부문(한국인삼공사)의 분리 상장을 요구한다. 담배와 인삼 부문은 서로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인적 구성과 향후 전략을 차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인삼공사는 KT&G의 100% 자회사이고 비상장 기업이다. 이 대표는 “건강 식품인 인삼 시장은 점점 고령화되는 글로벌 시장에서 잠재 가치가 크다”며 “지금처럼 담배 영업 직원들이 그대로 인삼 공사로 인사 이동하는 구조에선 경쟁력이 약하다”고 말했다. KT&G는 이에 대해 “현 경영 상황에서 주당 1만원 배당은 부담이 크고, 인삼공사를 분리했을 때의 기대 이익도 분명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미국선 ‘행동주의 연합’ 활발… 작년 17건

행동주의가 태동 단계인 한국과 달리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행동주의 펀드 간 연합이 자주 있는 일이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작년 2곳 이상의 행동주의 펀드가 한 회사의 경영에 관여한 사례는 17건에 달했다. 2021년에는 9건에 불과했지만, 코로나 사태 이전인 2019년엔 20건을 기록하는 등 ‘벌떼 공격’은 꾸준히 일어났다.

최근엔 엘리엇인베스트먼트와 스타보드밸류 등 미국의 행동주의 펀드 4곳이 소프트웨어 업체인 세일즈포스의 지분을 사들인 뒤 “순이익을 높이기 위해 체질 개선을 해야 한다”며 이사진 교체안을 준비하는 등의 압박 행보를 보이고 있다. 글로벌 미디어 업체인 디즈니도 최근 서드포인트 등 사모펀드 2곳으로부터 “스트리밍 업체를 인수해 디즈니 플랫폼에 통합시켜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WSJ는 “(작년) 증시가 하락하자 저평가된 회사들의 가치를 키우려는 활동이 늘어났다”며 “다수의 행동주의 주주들이 한 회사로 몰려가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금투업계 관계자는 “지분율이 1% 내외에 그치는 사모펀드들이 최대주주 측과 지분 경쟁을 벌이기 위해 뭉치는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다만 각 행동주의 펀드마다 요구 사항이 다르거나 서로 충돌하는 경우, ‘연합군’이 와해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