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3일 서울 중구 명동 은행회관에서 비상 거시경제금융회의를 마친 뒤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이날 급격한 금리 상승과 강원도 레고랜드의 어음 채무 불이행 사태로 촉발된 채권 시장 경색을 풀기 위해 50조원 이상의 자금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왼쪽부터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추 부총리,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뉴스1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23일 채권시장 안정을 위해 긴급 소집된 ‘비상 거시경제금융회의’를 마치고 “(시장 안정을 위해) 종전 원칙이나 방법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다”고 했다. 당장 24일부터 1조6000억원 채권시장안정펀드로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사들이고,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등을 동원해 비(非)우량 회사채와 CP를 매입하는 프로그램 한도를 8조원에서 16조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매입 대상에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에 발이 묶인 증권사 등 금융사가 발행한 CP도 포함됐다.

특히, 만기가 도래한 부동산 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상환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증권사들에 3조원을 추가 지원하는 대책도 내놨다. 강원도가 지급 보증을 했지만, ABCP 미상환 사태가 벌어진 ‘레고랜드’와 유사한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해 행정안전부가 각 지자체를 대표해 “모든 지자체가 지급 보증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확인하기도 했다. 부동산 PF 부실을 초래한 미분양 방지를 위한 규제 완화도 예고했다.

◇”급한 불은 끄겠지만 첩첩산중”

한 금융회사 관계자는 “비우량 채권과 부동산 PF ABCP까지 모두 사주겠다는 정부 방침이 나온 만큼, 마비됐던 단기 자금 시장 숨통이 일단 트일 것”이라며 “다만 앞으로도 금리 인상이 예고돼 있고, 부동산 시장 침체도 변수인 만큼 불안 요소가 남아 있다”고 평가했다. 이날 나온 대책으로 급한 불은 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금리 상승과 경기 둔화, 부동산 시장 침체가 길어질 수 있어 앞으로가 더 험난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50조원+α’주요 내용

당장 다음주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규모는 68조원대로 추산된다. 상환하거나,새로 회사채를 발행해 만기 회사채를 갚는 ‘차환’이 이뤄져야 하는데 시중 자금 경색이 심각한 상황이라 순조롭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또,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증권사와 건설사가 신용 보강한 만기도래 부동산 PF와 ABCP 규모가 연말까지 32조원, 내년 상반기에 57조원 등으로 약 90조원에 육박한다.

◇뒷북 대응으로 시장 불안 키웠다

“한전채가 시중 자금 빨아들인다고 경고음이 울린 게 지난 6월입니다. 은행채가 전체 채권 발행 물량의 40%에 육박한 게 7월이고요. 급기야 강원도가 보증 섰던 레고랜드 빚 못 갚겠다고 나온 게 한 달 전이에요. 채권 금리 치솟고 돈 필요한 기업들은 빌리지도 못하는 시장 마비가 왔는데, 여태 뭘 하다 일요일에 긴급 회의를 합니까.”

한 금융사 임원은 “정부가 그동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 문제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자금 시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는 상반기부터 흘러나왔다. 가뜩이나 기준금리 급등으로 시장 금리가 오르는 와중에, 대규모 적자로 운영 자금이 급한 한전이 연 4~5%짜리 고금리로 매달 2조원대 채권을 찍어내기 시작하자 다른 기업들은 갈수록 돈 빌리기가 어려워졌다.

은행들도 현금성 자산을 늘려야 하는 LCR(유동성 커버리지 비율) 규제에 대응하느라 단기 자금 마련을 위해 은행채를 9월에만 26조원 가까이 발행했다. 9월 시중 채권 발행 물량의 40%가 넘는 규모다. 이달 들어선 은행채와 특수채(한전채)를 합친 발행량이 전체 채권 발행량의 52%로 사상 최대가 됐다. 가뜩이나 돈 빌려준다는 곳은 없는데, 은행과 한전이 시중 자금 절반을 빨아들여 멀쩡한 기업도 돈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다급한 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금리에 은행 대출을 받으려고 줄을 섰고, 시중은행들은 이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3개월에 연 4%짜리 단기채를 발행해 돈을 마련하는 등 악순환이 벌어졌다.

◇금융 당국이 시장 신뢰 회복해야

신용등급 트리플A(AAA) 초우량 공사가 발행한 채권마저 매수자를 찾지 못해 유찰되는 등 자금 시장이 사실상 마비된 상황을 풀기 위해서는 정부가 시장의 신뢰를 되찾는 것이 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20일 “채권시장안정펀드를 곧 가동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다음 날인 21일 기업들의 단기 자금 융통 수단인 91일물 기업어음(CP) 금리가 4.250%까지 치솟아 금융 위기 당시인 2009년 1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할 정도로 정부가 시장의 신뢰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