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은 지난 5월5일 강원 춘천시 하중도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에서 시민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뉴스1

경기 둔화, 부동산 경기 침체, 금리 급등에 신용 등급이 높은 기업의 회사채까지 외면받으면서 채권시장이 패닉에 빠졌다. 지난 3분기에 발행된 회사채 가운데 A 등급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아 미매각률이 58%에 달했을 정도다. 최대 150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과 관련된 채권의 부실 위험도 급격하게 커지고 있다.

최근 터진 강원도 춘천 ‘레고랜드’의 2000억원대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부도 사태가 가뜩이나 얼어붙은 시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지급 보증을 선 강원도가 최근 “보증 채무를 이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채권 펀드에 투자된 자금들이 이탈하는 등 단기 금융시장의 동요와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21일 한국펀드평가에 따르면, 지난 19일 기준 회사채 펀드의 설정액은 총 49조3639억원으로 한 달 새 1조7000억원 줄어들었다. 펀드 투자자들이 환매하고 떠났다는 뜻이다. 금리 인상으로 채권 가격이 꾸준히 내려가는 데다, 레고랜드 사태가 도화선이 된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악화되면 ‘펀드런(대규모 펀드 환매 사태)’이 일어날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채권시장에 충격을 준 ‘레고랜드 사태’는 사업자인 강원도 산하 강원중도개발공사가 자금 조달을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아이원제일차)에서 발행한 2050억원 ABCP가 지난 9월 말 만기가 돌아왔지만 연장이 되지 않고 미상환 상태에서 지난 6일 부도 처리된 것이다. 강원도가 만기 연장 대신 “법원에 강원중도개발공사 회생 신청을 내겠다”고 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채권시장이 급격하게 식어가면서 채권 가격이 급락, 채권 금리는 치솟고 있다. 채권은 사겠다는 투자자가 줄면 금리를 높여줘야 하니 가격은 떨어지고, 금리는 뛴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업들이 회사채를 발행하려면 금리를 높여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커진다. 그래도 팔리지 않아 자금 조달에 어려움이 가중된다.

이날 채권시장에서 국고채 10년물 금리는 4.632%까지 오르며 연중 최고치를 경신했다. 전날 기업어음(CP·91일물) 금리는 4.1%를 기록, 금융 위기였던 2009년 이후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또 신용스프레드(회사채와 국고채 금리 차이)도 올 초 대비 2배로 벌어져, 일반 기업들의 차입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심지어 최상위 신용도를 가진 공사채마저 팔리지 않는다. 투자은행 업계에 따르면, 이날 부산교통공사(신용도 AAA급)는 500억원어치 공사채 입찰에서 400억원 주문을 받는 데 그쳐 발행을 포기했다. 한국전력공사(AAA급)도 2000억원의 모집 물량을 채우지 못해 채권 발행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업계에 따르면, 국내 최대 재건축 사업장인 서울 둔촌 주공아파트 PF에 참여한 증권사들은 총 7000억원 규모의 대출 갈아타기에 실패했다. 7000억원에 1250억원을 얹어 총 8250억원어치 ABCP 발행을 시도했으나 투자자를 구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따라 보증을 선 건설사들이 7000억원을 채권자들에게 물어주게 됐다.

채권시장이 흔들리자 금융 당국이 다급하게 나섰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이날 국회 국정감사에서 “지금 자금 시장이 프로젝트파이낸싱 ABCP를 중심으로 단기 시장, 회사채 시장까지 불안한 양상”이라며 “시장 안정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점검해 나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날도 채권 등 단기 자금 시황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증권사 주가가 일제히 하락했다. 유가증권시장에서 증권사 19곳을 모아놓은 ‘코스피 증권’ 지수는 전날(-3.4%)에 이어 21일도 1.5% 하락했다. 부도가 난 레고랜드 ABCP를 판매한 미래에셋증권(-2.1%)과 삼성증권(-1%)도 소폭 하락했다. 자금 시장과 긴밀하게 연결된 부동산 전망도 위축돼 리츠(부동산 투자 신탁 회사) 주식들도 다수 하락했다. 김지영 교보증권 연구원은 “경기에 민감한 상업용 부동산과 공급 과잉 우려가 있는 물류센터까지 위험이 확산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경록 신영증권 연구원은 “채권시장 안정 펀드 등 조치가 나오고 있지만 한번 무너진 심리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좀 더 강력한 추가 안정책이 나와야 할 것”이라며 “시장 유동성 공급을 위해 지난 2020년 코로나 확산 때처럼 적격담보증권(한국은행이 시중은행에 대출해줄 때 인정하는 담보)의 전향적 확대 조치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