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조류 암수를 오가며 정자를 옮기는 해양 갑각류(Idotea balthica)./CNRS

꽃가루받이 하면 누구나 꿀벌과 나비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환경에 따라 예상치 못한 동물이 벌·나비를 대신할 수도 있다. 바다에선 작은 갑각류가 해조류의 수정을 돕고, 밤에는 나방이 꽃가루를 옮긴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CNRS)의 미리엄 발레로 박사 연구진은 지난달 29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쥐며느리와 비슷한 해양 갑각류가 홍조류의 암수 개체 사이를 이동하면서 정자를 옮겨 수정을 돕는다”고 밝혔다.

홍조류 암수를 오가며 정자를 옮기는 해양 갑각류(Idotea balthica)./CNRS

바닷말인 홍조류는 번식 과정에서 암수로 나뉜다. 수컷에서 나온 정자가 암컷으로 옮아가 수정되면 식물의 열매와 비슷한 낭과가 형성된다. 지금까지는 바닷물이 정자를 옮긴다고 생각했다. 연구진은 정자 이동에 동물이 관여하는지 실험을 통해 알아봤다.

먼저 홍조류 암수 개체가 하나씩 있는 수조에 쥐며느리처럼 생긴 해양 갑각류(학명 Idotea balthica) 20마리를 집어넣었다. 암수의 간격은 15㎝였다. 한 수조에는 갑각류 없이 홍조류만 키웠다. 실험 결과 갑각류가 있는 수조에서 수정으로 생기는 낭과가 20배나 더 많이 관찰됐다. 갑각류의 배와 다리에 정자가 붙어있는 모습도 포착됐다. 연구진은 갑각류들이 홍조류 암수 개체를 오가면서 정자를 옮긴다고 설명했다.

홍조류 암수를 오가며 정자를 옮기는 해양 갑각류(Idotea balthica). 다리와 배에 홍조류의 정자(녹색)가 붙어있다./CNRS

동물을 통한 수정은 육지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경계가 무너졌다. 지난 2016년 카리브해에서 사는 바다 식물인 해초에서 동물성 플랑크톤이 꽃가루받이를 돕는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해조류는 해초와 달리 육지 식물과 무관하다. 이 점에서 이번 발견은 생물 진화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발레로 박사는 “그동안 4억5000만년 전 식물이 바다에서 뭍으로 나온 이후 동물을 통한 수정이 출현했다고 생각했다”며 “홍조류는 8억년 전부터 있었다는 점에서 동물을 통한 수정은 육지 식물보다 더 먼저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벌·나비가 없는 밤에는 나방이 꽃가루받이를 돕는다. 덴마크 오르후스대의 제이미 앨리슨 박사 연구진은 지난 7월 국제 학술지 ‘바이올로지 레터’에 “알프스산맥에 사는 붉은토끼풀이 밤에 큰노랑뒷날개나방(Noctua pronuba)의 도움을 받아 꽃가루받이를 하는 것을 처음 확인했다”고 밝혔다.

나방이 붉은토끼풀에 앉은 모습. 나방이 밤에 토끼풀의 꽃가루받이를 돕는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Jeff Kerby

연구진은 지난해 6~8월 스위스 알프스산맥의 붉은토끼풀 자생지에 동작 감응 카메라 15대를 설치했다. 나중에 찍힌 사진을 확인해보니 토끼풀을 찾은 곤충은 예상대로 대부분 뒤영벌(61%)이었지만 나방도 34%를 차지했다. 나머지는 기생벌 같은 다른 곤충들이었다.

나방이 밤에 후각에 의존해 꽃을 찾는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알려졌지만 붉은토끼풀은 전적으로 벌에 꽃가루받이를 의존한다고 생각했다. 연구진은 토끼풀은 꿀을 제공하고 가축의 사료로도 인기가 높다는 점에서 이번 결과가 농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밤에 나방이 찾은 토끼풀은 씨앗을 더 많이 맺었다. 해충으로만 생각하던 나방이 목축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