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 이보다 더 작은 입자를 보려면 단단한 원자를 엄청난 속도로 가속해 충돌시켜야 한다. 한인 여성 과학자가 원자보다 더 단단한 세계 물리학계의 벽을 깨부쉈다. 김영기(59) 시카고대 물리학과 석좌교수 이야기다. 그는 지난 8일(현지 시각) 미국 물리학회 5만5000여 회원이 참여한 선거에서 차차기 회장인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미국 물리학회는 회원 선거를 통해 부회장(Vice President)에 당선되면 다음 해부터 1년씩 차기회장(President-Elect), 회장(President), 전임 회장(Past President)을 맡는다. 여성이자 아시아인이 남성과 백인 중심의 물리학계를 이끄는 수장이 된 것이다.

여성이자 아시아인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남성과 백인 중심의 미국 물리학계 수장이 된 김영기 시카고대 물리학과 석좌교수. 김 교수는 내년 부회장을 시작으로 2023년 차기 회장, 2024년 회장, 2025년 전임회장을 거치며 4년간 미 물리학회를 이끌게 된다. 사진은 김 교수가 2019년 본지와 인터뷰하는 모습. /주완중 기자

김 교수는 9일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이 자리가 목표는 아니었지만, 연구를 열심히 하고 각종 과학 단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면서 “앞으로 전 세계 연구자들이 국경 없이 자유롭게 협력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1899년 설립된 미국 물리학회는 세계 최고 권위의 과학 단체다. 당연히 회장도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맡는다. 김 교수는 입자물리학 분야의 석학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미국 과학 전문지 ‘디스커버’는 2000년 ‘향후 20년간 세계 과학 발전을 주도할 과학자 20명’ 중 한 사람으로 김 교수를 뽑았다. 이때 ‘충돌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입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한 뒤 충돌해 우주 탄생 초기를 재현하는 입자물리학에서 우뚝 선 여성이라는 뜻이다.

경북 경산 출신인 그는 고려대 물리학과 석사를 졸업하고, 미국 로체스터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UC버클리 교수를 거쳐 현재 시카고대 물리학과장을 맡고 있다. 시카고대 물리학과는 졸업생과 전·현직 교직원들이 받은 노벨 물리학상이 32개나 될 정도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한다. 특히 김 교수는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의 학맥을 잇고 있다. 김 교수의 지도 교수인 고려대 강주상 교수가 이휘소 박사의 수제자다. 김 교수가 부소장으로 일했던 국립페르미연구소는 이휘소 박사가 별세하기 전까지 이론물리부장을 맡았던 곳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입자가 가속기에서 충돌하는 것처럼 사람들과의 충돌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여러 사람의 생각이 치열한 토론으로 이어져야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과거 뉴턴은 혼자서 연구를 했지만 21세기 과학은 수많은 사람이 충돌하면서 이뤄지고 있다”며 “인종과 성별, 나이에 따라 경험이 모두 달라 이들이 모이면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기초과학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열매를 맺기 위해선 씨를 심어야 한다”라며 “그 씨앗이 기초과학이다”라고 했다. 처음 나왔을 때 몇몇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던 양자역학 덕분에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같은 전자 제품들이 탄생했고 GPS(위성항법시스템)에는 100년 전 수식에 불과했던 상대성이론이 적용됐다. 김 교수는 “몇 세대가 걸리더라도 언젠가 사회는 기초과학 덕을 본다”며 “손자, 손녀들을 위한 연구라고 생각하고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매일 새벽 6시 유럽 연구진과 하는 화상회의로 하루를 시작한다. 바쁜 외부 활동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제가 모르는 분야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목표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