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년 동안 접힌 상태로 있던 편지를 컴퓨터 알고리듬을 이용해 가상공간에서 펼치는 과정./네이처

꼬깃꼬깃 접은 편지가 320년 만에 펼쳐졌다. 손으로 펼쳤다면 바로 바스러져 가루가 됐겠지만 X선과 컴퓨터 덕분에 종이에 손 하나 안대고 가상현실에서 마음대로 편지를 열어 볼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 국제 공동 연구진은 2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첨단 컴퓨터 영상과 알고리듬을 이용해 종이를 펼치지 않고 17세기 미개봉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에는 영국 퀸 메리 런던대의 그레이엄 데이비스 교수와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도서관의 보존학자인 야나 담브로지오, 컴퓨터 소프트웨어 업체인 어도비의 아만다 가사에이 등 11명이 참여했다.

320년 넘게 접힌 상태로 있던 편지를 컴퓨터와 X선을 이용해 가상공간에서 펼치는 모습./네이처

◇접힌 편지를 CT로 찍어 입체 구조 확인

연구진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한 우체국장이 편지를 보관하던 트렁크를 조사했다. 그 안에는 1680년부터 1706년 사이 유럽 전역에서 온 편지 3148통이 있었으며, 그 중 577통은 개봉되지 않은 상태였다. 편지가 무슨 내용인지 보려고 하다가는 종이가 손상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편지를 봉투에 넣는 대신 각자 자신만의 방법대로 복잡하게 접어 발송했다. 편지봉투는 1830년대에 보편화됐다. 트렁크에 있는 편지들은 워낙 오래돼 접힌 부분을 원래대로 펼치기 힘든 상태였다.

17세기 네덜란드 헤이그의 우체국장이 편지를 보관한 상자. 그 안에 미개봉 상태로 접혀 있던 편지를 펼치지 않고 X선과 컴퓨터 기술로 내용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네이처

연구진은 먼저 고해상도 X선 영상장치로 편지를 촬영했다. 편지의 단면을 층층이 X선으로 찍고 이를 컴퓨터에서 합쳐 미개봉 편지의 입체 구조를 확인했다. 사람 몸의 내부를 CT(컴퓨터 단층촬영)로 보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다음은 컴퓨터 알고리듬을 이용해 각각의 종이 층이 어디인지, 또 종이가 접힌 선의 두께는 어느 정도인지 분석했다. 접힌 부분이 두꺼우면 더 많은 종이가 접혀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를 근거로 컴퓨터 가상 공간에서 접힌 종이를 한 장씩 펼치고, 그 위에 있는 글자를 분석했다.

1697년 7월 31일 프랑스 릴의 한 변호사가 헤이그의 상인에게 보낸 편지를 펼치지 않고 X선과 컴퓨터를 이용해 재구성한 모습. 친척의 사망증명서를 보내라고 하는 내용임을 확인했다./네이처

연구진은 이 방법으로 1697년 7월 31일 프랑스 릴의 한 변호사가 헤이그의 상인에게 보낸 편지가 친척의 사망증명서를 보내라고 하는 내용임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이 편지의 수신인만 알았지 내용은 알지 못했다.

학계에서는 이번에 개발된 기술로 더 많은 미개봉 편지의 내용이 확인되면 근대 초기 유럽의 우편망뿐 아니라 해당 지역의 정치, 종교, 음악, 문학과 이민 과정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