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를 졸업하며 정해진 대로 의사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싫어서 들어선 기초과학자의 삶이 어느덧 46년이 됐습니다.”
23일 오전 대전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신희섭(70)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 사회성 뇌과학 그룹 단장의 퇴임식이 열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뇌 과학자로, 1974년부터 50년 가까이 기초과학 연구에 몰두해온 신 단장은 이날 연구 인생에 쉼표를 찍었다. 그는 “수많은 동료와 선후배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행복한 연구자의 길을 달려왔다”고 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지만, 남들처럼 의사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미국 코넬대 의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며 기초의학자로 진로를 바꿨다. 1991년 귀국한 이후론 30여 년 동안 뇌 과학을 탐구했다. 포스텍(포항공대) 교수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장 등을 지내며 2012년 7월 IBS의 첫 연구단장으로 선정돼 지금까지 연구단을 이끌어 왔다.
그는 뇌 과학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스승도 없이 연구에 대한 열정만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갔다. 2000년대 초 사람 대신 생쥐를 이용한 뇌과학 연구 분야를 열었다. 기억·감정·공감 등 인지기능의 발생 메커니즘을 규명하고, 국내에선 처음으로 이 연구에 유전학을 도입했다. 간질이나 운동마비 등 뇌신경 질환의 발병 원인을 유전자 수준에서 규명한 연구로 세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수면 중 뇌파를 조절해 학습 기억력을 2배 높인 연구와 공포 기억을 억제하는 뇌 회로를 규명한 연구,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법 등의 성과를 잇따라 발표했다. 저명한 국제 학술지에 실린 그의 논문은 197편이 넘는다. 1987년 노벨상을 받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의 도네가와 스스무 교수가 신 단장이 먼저 통증 유전자를 찾아내자 아예 연구를 접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세계가 주목하는 성과를 내면서 호암상,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등 과학상을 휩쓸었다. 2006년 과학기술부 1호 국가과학자에도 선정됐다.
신 단장은 퇴임하면서 후배 과학자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연구자의 길로 들어설 때 내 인생을 오롯이 연구에 쏟아붓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이것이 내 인생을 드라이브해왔다”고 했다. 이어 “연구자의 길을 선택했으면 좀 미쳐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며 “그렇지 않으면 이 길은 별로 재미없는 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IBS 단장직에선 퇴임했지만 그의 연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IBS 명예 연구위원으로 남아 후학 양성과 남은 연구에 집중할 예정이다. 그는 “그동안 연구단에서 이룩한 시스템을 바탕으로 후배 연구자들이 더 깊이, 더 높게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며 “산업계와 연계해 뇌 질환 치료제 개발에 기여하고 싶다. 글로벌 수준 치료제 개발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형외과 의사인 황건 교수의 시 ‘흔적’을 읊으며 퇴임사를 마무리했다.
‘퍼지르고 앉으니 내 자리던데/ 일어나 둘러보면 흔적도 없어/ 앞을 보고 걸으니 내 길이던데/ 멈춰 돌아보면 자국도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