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구반포역 인근에는 최고 분양가가 약 53억원에 달하는 고급 오피스텔 ‘인시그니아 반포’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수교차로 바로 앞에 위치해 교통량이 많은 이곳엔 2년 전만 해도 SK반포주유소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 부동산신탁회사인 코람코자산신탁이 이 부지를 매입한 후 작년부터 주유소를 헐고 2025년 준공을 목표로 2개동 최고 20층, 148실의 오피스텔을 짓고 있다.

최근 주유소들은 가격 경쟁 과열과 인건비·임대료 부담으로 수익성이 악화한 데다, 전기차 보급으로 사업 전망마저 불투명해지자 문을 닫고 있다. 반면 부동산 개발업체들은 대로변 알짜 입지에 위치한 주유소 부지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노른자위 땅에 자리 잡은 주유소들이 잇따라 폐업 후 오피스텔이나 지식산업센터, 청년주택 등으로 변신 중인 것이다.

그래픽=백형선

◇주유기 떼고 지식산업센터·주택으로 변신

주유소 숫자는 갈수록 줄고 있다. 18일 한국석유관리원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서울 시내 주유소는 442곳. 5년 전인 2017년(537곳)과 비교해 95곳(17.7%)이나 줄었다. 2010년대 들어 과당경쟁과 인건비·임대료 부담으로 점차 수익이 줄어든 것이 폐업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향후 전망이 밝은 것도 아니다. 전기차·하이브리드 등 친환경 차량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지만, 전기차 충전기 설치 등 시설 투자는 쉽지 않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전기차·수소차 전환 등의 영향으로 현재 전국 1만1000여 곳인 국내 주유소가 2040년에는 3000여 곳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보고서까지 내놨다.

그래픽=백형선

문을 닫은 주유소 자리에는 새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다. 올해 2월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1가에 준공된 지식산업센터 ‘양평자이비즈타워’는 원래 현대오일뱅크 선유로주유소가 있었던 곳이다. GS건설 자회사인 자이S&D가 2020년 약 700억원에 사들인 서울 주유소 부지 5곳 중 하나다. 미아동·거여동·보문동·중화동 등에 위치한 나머지 4개 부지는 역세권 청년임대주택으로 개발할 예정이다. 자이S&D 관계자는 “서울 도심에서 개발 부지를 구하기 어려웠는데, 5곳 모두 지하철역에서 200m 이내로 입지가 좋아 개발이익이 크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주유소는 교통 입지가 좋은 만큼, 다양한 용도로 개발되고 있다. 코람코자산신탁은 서울 종로구 경운동 ‘현대오일뱅크 재동주유소’ 부지에 공유주택(코리빙하우스)을 개발할 계획이다. 공유주택은 주거 공간은 분리돼 있지만, 거실·주방은 공유하는 주거 스타일을 말한다. 안국역 5번 출구와 맞닿은 초역세권으로 교통이 편리해, 종로와 광화문 등에서 근무하는 MZ세대 직장인 수요를 겨냥하고 있다. 작년 10월에는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7가 GS칼텍스 대영주유소 자리에 지식산업센터 ‘KLK 유윈시티’가 들어섰다. 역시 직장과 거주지가 가까운 직주근접(職住近接)을 노린 것이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GS칼텍스 한강주유소 부지는 고급 오피스텔로 개발될 예정이다.

◇대로변에 용적률도 높아 매력적

부동산 개발 측면에서 주유소의 장점은 교통 입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네모 반듯한 형태인 데다 대로변에 위치해 차량이 쉽게 드나들 수 있다. 토지용도도 준주거지역이나 상업지역인 경우가 많아 용적률을 높게 받기 좋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빈 땅이 거의 없는 서울 도심에서 주유소는 희소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며 “요즘 같은 부동산 불황에도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지난해 강남구 삼성동 ‘SK 오천주유소’ 부지는 3.3㎡당 1억9000만원에 시장에 나왔지만, 10여 개 자산운용사와 시행사, 기업이 매입 경쟁을 벌이면서 3.3㎡당 2억6000만원에 팔렸다. 고준석 제이에듀투자자문 대표는 “대도시에서는 개발할 만한 땅이 워낙 부족하기 때문에 주유소가 오피스텔이나 상업시설로 개발되는 흐름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