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정부가 서울·수도권에 13만2000가구를 공급하겠다며 내놓은 ‘8·4 대책’이 1년째 헛돌고 있다. 당시까지 규제 일변도였던 정부는 공공부지에 3만3000가구, 공공재건축 5만 가구와 공공재개발 2만 가구, 도심 고밀개발 등으로 2만9000가구를 짓겠다며 대규모 공급으로 선회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4개 사업 모두 진척이 사실상 전무(全無)하다. 전문가들은 “급조한 공공 주도 공급 대책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라고 평가한다.

2일 서울 노원구 아파트단지 일대. 2021.08.02.뉴시스

3일 국토교통부와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8·4 대책에 포함된 공공부지를 활용한 공급 물량 3만3000가구 중 현재까지 개발 계획이 확정됐거나 지구지정이 완료된 곳은 한 곳도 없다. 올 상반기 지구지정을 마무리하려던 태릉골프장(1만 가구)은 노원구청 등의 반발로 제동이 걸렸고, 과천정부청사(4000가구) 개발은 과천시와 주민 반발에 사업을 접고 대체 부지를 찾고 있다. 마포구 서부면허시험장(3500가구), 상암DMC 유휴부지(2000가구) 개발도 진척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공공 소유인 이 부지들은 정부와 지자체가 합의만 하면 당장 개발할 수 있지만 타결된 곳은 없다.

정부가 용적률 완화 같은 인센티브를 제공해 5만 가구를 공급하겠다던 공공재건축은 지금까지 후보지 4개 단지 1580가구만 선정했다. 당초 목표의 3%다. 그나마 강남 등 인기 지역은 없고 모두 300가구 미만 소형 단지뿐이다.

8·4 대책은 문재인 대통령이 작년 7월 초 김현미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공급 대책을 주문하고 한 달여 만에 나왔다. 준비 기간이 워낙 짧았던 탓에 사업 대상지 지자체나 주민 협의는 생략됐다. 대책 발표 직후부터 전문가들 사이에선 “주민이나 지자체 반발에 부딪혀 실제 공급까진 상당한 진통이 있을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윤주선 홍익대 교수는 “대책 발표 1년이 지나도록 아무 성과가 없다는 건 공공 주도 일변도로 주택을 공급하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라며 “지금이라도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 등 민간의 역량을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공급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13만가구 공급 자신하더니… 결국 말잔치로 끝났다

지난해 8월 4일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서울시 등 8개 부처 및 광역지방자치단체가 현 정부 첫 대규모 부동산 공급 대책을 내놨다. 과천정부청사 부지, 서울 태릉골프장, 마포 서부운전면허시험장 같은 정부 또는 지자체 소유 땅에 3만3000가구를 짓고, LH·SH가 참여하는 공공 재건축 5만 가구 등 총 13만2000가구를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책은 발표 직후부터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발표 당일 과천시장이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과천시 의견이 완전히 묵살됐다”는 성명을 낸 것을 필두로 노원구청장과 마포구청장, 지역구 의원 등 여당 소속 정치인들이 줄줄이 반대하고 나섰다. 최소한의 의견 수렴도 없이 발표부터 한 결과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지만 8·4 대책은 여전히 헛바퀴를 돌고 있다. 전문가들은 “당초 여당 지자체장조차 설득 못 할 정도로 준비가 부족했고, 대책 자체도 민간 참여 없는 공공 만능주의, 신규 건설만 고집한 기형적 정책이었다는 점에서 ‘예견된 실패’”라고 말한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홍남기 부총리 /자료=국토교통부, 서울시, 부동산 업계.

◇지자체 협의도 없었다 ‘예견된 실패’

8·4 대책 발표 이후 해당 지역들에선 교통 대란, 녹지 훼손 같은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불거지며 지역 여론이 악화했다. 정부는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 광역지자체인 서울시와 경기도를 참여시켰지만, 정작 실제 개발이 이뤄질 구(區)나 시(市) 단위 지자체와 현지 주민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건너뛰었다.

정부 차원의 부동산 대책은 해당 지자체와 협의를 마친 후 발표하는 게 일반적이다. 2018~2019년 발표한 3기 신도시도 해당 시구와 협의를 마무리한 후 입지가 공개됐다. 하지만 8·4 대책은 유독 여론에 떠밀려 급하게 만든 탓에 협의가 생략됐고, 지자체 반발에 정부가 끌려다니면서 대폭 수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신규 택지 중 가장 물량이 많은 태릉골프장(1만가구)은 노원구가 국토부에 공급 물량을 5000가구 수준으로 줄여달라고 요구한 상태다. 과천정부청사는 기존 공급 계획이 백지화됐다. 국토부는 “대체 용지를 마련해 기존보다 많은 4300가구를 공급하겠다”고 했지만 정부 스스로 정책 신뢰를 깎아먹었다는 평이 나온다.

◇공공 만능주의에 민간 반응 ‘싸늘’

모든 주택 공급을 정부가 주도한다는 ‘공공 만능주의’도 실패 원인으로 꼽힌다. 공공 재건축이 대표적 사례다. 공기업이 공동 사업자로 참여하는 공공 재건축은 용적률을 늘려주는 대신 민간 재건축보다 공공 임대주택을 많이 지어야 한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인기 지역 재건축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서는 ‘공공으로 할 바에야 차라리 재건축을 안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공 개발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고 전했다. 당초 5만 가구를 목표로 한 공공 재건축은 현재 그 3% 선인 1580가구만 겨우 후보로 확보했을 만큼 외면당했다.

하지만 정부는 ‘2·4 대책’에서 공공의 개입 강도를 더 높인 ‘공공 직접 시행 정비 사업’을 들고 나왔다. 땅을 아예 공공에 넘기고 사업을 진행하는 방식인데, 현재까지 단 한 곳의 후보지조차 선정하지 못하고 있다. 서진형 경인여대 교수(대한부동산학회장)는 “정부는 사실상 민간 재건축·재개발을 악으로 보고 공급을 억제하고 있다”며 “토지주 참여가 중요한 정비 사업에서 공공 위주 방식으로는 성과를 내기 힘들다”고 했다.

◇신규 건설만 고집, 단기 대책 포기

정부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신규 건설만 고집한 것도 실패 요인이다. 현 정부는 200만 가구 이상의 주택을 공급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대부분 새로 주택을 짓는 방식이다. 아무리 빨라도 2025년 이후에야 입주가 가능하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정부가 계획한 물량의 실제 입주가 이뤄지기 전까지 공백기를 메우기 위해서라도 기존 주택이 시장에 나오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며 “다주택자가 보유한 주택을 팔 수 있도록 양도세를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부동산 정보 업체 부동산114에 따르면 올해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은 3만864가구로 지난해(4만9411가구)보다 37.5%가량 적다. 내년 입주 물량은 2만463가구로 올해보다 34% 줄어들 전망이다. 당장 물량이 부족한 데다 전세난까지 심해지면서 ‘지금이라도 집을 사야 한다’는 패닉 바잉 움직임이 멈추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