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에는 ‘수퍼 사이클’이라는 말이 있다. 반도체 경기의 장기 호황을 뜻한다. 지금까지 수퍼 사이클은 기술 발전에 따라 반도체 수요가 폭발할 때 나타났다. 대체로 4∼5년 주기로 돌아오고, 2년여간 이어졌다. 개인용 컴퓨터(PC) 수요가 급증한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서버 투자 등이 활발했던 2000년 중반, 스마트폰 사용이 본격화된 2010년대 초반, 인공지능·사물인터넷 등 4차 산업혁명 초입이던 2017~2018년 등이 대표적인 수퍼 사이클에 해당한다.

지난해 수퍼 사이클이 다시 왔다. 코로나19로 비대면이 늘어나면서 스마트폰과 PC 등 IT 제품 수요가 늘었고, 가상화폐 시장 호황과 자율주행 기술 발전, 데이터 센터 구축 붐도 반도체 수요를 키웠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반도체 매출은 5950억달러(약 730조3600억원)로 전년(4709억달러)보다 약 26% 증가했다. 당연히 반도체 기업들은 돈을 쓸어 담았다. 삼성전자는 작년 한 해 매출 279조400억원, 영업이익 51조5700억원을 기록했다. 2018년 반도체 수퍼 사이클 당시보다 매출이 30조원 이상 늘었다. SK하이닉스도 작년 매출이 약 43조원으로 2018년(40조4400억원)을 넘어섰다.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도 작년 매출이 전년 대비 60% 증가했다.

그런데 최소 올해 연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됐던 수퍼 사이클이 소멸되는 징후가 뚜렷하다. 30개 미국 반도체 관련 업체의 주가를 나타내는 필라델피아반도체 지수는 올해 초 4027에서 지난 27일 2894로 28% 떨어졌다. 같은 기간 8.9% 떨어진 다우지수보다 하락 폭이 훨씬 크다. 삼성전자 주가는 지난 27일 52주 신저가인 6만5000원까지 내려가 ‘육만전자’가 고착화되는 양상이다.

그래픽=김의균

◇반도체 수요 줄고, 중국 봉쇄 먹구름

올해 초까지만 해도 반도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국내 서학개미들이 대표적으로 선호하는 종목으로 꼽히는 엔디비아의 경우 지난해 3월 120달러 선이던 주가가 11월 329달러까지 급상승한 뒤 연초(1월 3일)에도 300달러 선을 지켰다. 삼성전자도 지난해 10월 7만원 아래로 떨어졌던 주가가 다시 반등해 연말에는 8만원 선을 회복했다.

하지만 이후 주가가 내림세를 타기 시작했고, 최근 들어 하락 속도가 더 빨라졌다. 메모리와 비(非)메모리, 팹리스(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미국 증시에서 주요 반도체 기업 종목을 뜻하는 ‘망고(MANGO)’는 올 들어 평균 25% 떨어졌다. 마벨(MRVL), AMD, 엔비디아, 글로벌파운드리, 온세미컨덕터(ON) 등 망고에 속한 7개 반도체 기업 중 연초보다 오른 종목은 하나도 없다. 엔비디아는 연초보다 39% 하락해 184달러 선까지 내려왔다. AMD와 마벨도 각각 43%와 37% 빠졌다. 생산 주문이 밀려 고객사가 줄을 선다는 대만 TSMC도 연초 이후 지난 27일까지 주가가 29% 빠졌다.

하락장 초기에는 지난해 급등한 주가가 잠시 조정기에 들어갔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하락장이 길어지며 수퍼 사이클이 이미 소멸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반도체 수요 전망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중단됐던 일상이 회복되고 비대면 근무가 대면 근무로 전환되면서 주요 IT 기기 수요는 이미 감소세다.

가트너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전 세계 PC 출하량은 작년 1분기보다 7.3% 감소한 7750만대에 그쳤다. 같은 기간 글로벌 스마트폰 출하량은 전 분기 대비 11% 감소했다. 게리 모블리 웰스파고 연구원은 “갑작스러운 수요 약세가 반도체 주가 하락을 불렀다”며 “향후 반도체 수요와 공급 간 괴리가 줄고, 칩 주문이나 제조 시간이 줄기 시작하면 업체들의 실적이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 윌리엄 스타인 트루이스트증권 연구원은 “2분기에 컴퓨터, 통신 장비, 일반 소비자 기기용 반도체 수요가 급감할 수 있다는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인 금리 인상 기조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반도체 회사들은 대규모 투자가 필수적인데, 금리가 오르면 투자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코로나 확산을 막겠다며 상하이, 시안, 쑤저우 등 대도시를 잇따라 봉쇄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코로나 봉쇄로 시안에 있는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공장과 정저우에 있는 폭스콘의 아이폰 생산 공장 등이 상당 기간 가동 중단되면서 반도체 공급망이 줄줄이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봉쇄가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자동차·PC·스마트폰 등 반도체가 쓰이는 품목들이 제대로 출하가 안 되는 병목 현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예측 어려워진 수퍼 사이클

업계에서는 반도체 수퍼 사이클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과거에는 ‘반도체의 집적회로 성능은 2년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는 이른바 무어의 법칙이 통했다. 또 월드컵이나 올림픽처럼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대형 이벤트에 따라 전자제품 수요가 커지면서 그 주기에 맞춰 기술이 개발되며 성장했다.

그러나 반도체 기술이 장기간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더는 과거만큼 빠른 시일 내에 기술을 끌어올리기가 어렵다. 또 반도체 수요가 가전제품이 아니라 플랫폼 기업의 데이터 센터로 옮겨가면서 언제 어디서 수요가 생겨날지 예측도 쉽지 않아졌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3분기 실적 발표에서 반도체 수퍼 사이클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있다면서 그 원인 중 하나로 반도체의 응용처가 확대된 점을 꼽았다. 과거에는 메모리반도체 수요가 PC에 한정됐지만, 현재는 모바일과 데이터서버가 각각 40%·30% 정도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사이클의 폭과 주기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 번 수퍼 사이클이 시작되면 최소 1~2년은 수월하게 기업 실적과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한 투자 방식도 효력을 잃고 있다. 산업연구원 김양팽 연구원은 “반도체 기술 발전 속도나 수요 등 모든 면에서 과거의 법칙이 통하지 않다 보니 더는 예전 같은 수퍼 사이클은 나타나지 않는다”며 “반도체 기업의 주가도 단기간에 출렁이면서 예측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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