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이 이달 중순부터 LG생활건강 상품을 ‘로켓배송’으로 판매한다고 12일 밝혔다. 2019년 4월 납품 단가와 수수료 갈등으로 직거래를 끊은 지 4년 9개월 만이다. 작년 3분기에만 8조원 넘는 매출을 올리면서 국내 1위 이커머스 플랫폼 자리를 굳히는 쿠팡과 화장품·샴푸·치약·음료 등 생활 소비재 최강자로 불리는 LG생활건강이 벌이던 ‘극한 대치’가 일단락하는 모양새다.

2021년 2월 15일 오후 쿠팡이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을 앞두고 현장 직원에게 주식을 무상으로 부여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서울 서초구의 한 주차장에 쿠팡 배송트럭이 주차되어 있다. /고운호 기자

국내 이커머스 시장 성장에 코로나 반사 이익까지 누린 쿠팡은 몸집을 키우는 과정에서 상품을 공급하는 국내 제조사들과 여러 갈등을 빚었다. 대표적인 기업이 ‘코카콜라’를 유통하는 LG생활건강과 즉석밥 ‘햇반’을 만드는 CJ제일제당이었다. 특히 LG생활건강은 쿠팡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공정거래법을 위반했다며 공정위에 신고했고, 쿠팡은 33억원에 달하는 과징금 처분에 반발해 행정소송까지 냈다.

이처럼 대립하던 쿠팡과 LG생활건강이 다시 거래를 재개한 배경은 무엇일까. ‘반(反)쿠팡 연대’를 형성한 제조사들이 새로운 온라인 판로를 개척하고, 알리익스프레스 같은 중국 이커머스 업체가 국내에서 급성장하면서 쿠팡이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래픽=이철원

◇4년 9개월 만에 코카콜라 ‘로켓배송’

쿠팡 이용자는 이달 중순부터 LG생활건강이 생산하는 생필품과 코카콜라 등을 주문하면 바로 다음 날 받게 된다. ‘오휘’, ‘더후’ 같은 브랜드는 쿠팡의 고급 화장품 전용관 ‘로켓럭셔리’에서 판매한다.

쿠팡과 LG생활건강은 작년 초부터 거래 재개를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쿠팡 쪽에서 LG생활건강에 먼저 손을 내밀고, 수수료 등 거래 조건을 이전보다 좋게 바꾸는 등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LG생활건강이 작년 11월 중국 최대 쇼핑 축제인 광군제 기간에 맞춰 알리익스프레스에 ‘코카콜라 전용관’을 오픈하며 국내 온라인 판매망을 확충한 것도 쿠팡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알리익스프레스에는 LG생활건강 외에도 전기밥솥으로 유명한 쿠쿠, 세제·비누·화장품 등을 생산하는 애경 등 국내 브랜드 입점이 늘고 있다.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 같은 중국 직구 업체들이 배송 기간을 단축하면서 국내 이용자가 크게 늘었고, 쿠팡 입장에선 중국 업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LG생활건강과 거래를 재개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분석이다. 국내 쇼핑앱 1위라는 지위를 이용해 대기업 제품을 중소업체 상품으로 대체해 판매하던 쿠팡이 중국 업체의 공세가 거세지자 자세를 낮췄다는 것이다. 중국 내 화장품 매출이 급감하며 실적 개선이 필요한 LG생활건강도 쿠팡과의 거래 재개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CJ·신세계·농심·오리온 등도 쿠팡과 대립

실제로 주요 제조사들이 국내 이용자 수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중국 이커머스로 판로를 넓히는 것은 쿠팡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작년 12월 쇼핑 부문 신규 설치 앱 1위는 중국 테무(187만건)였고, 2위는 알리익스프레스(59만건)였다. 쿠팡(42만건)은 4위로 집계됐다. 쿠팡의 월간 활성 이용자 수도 작년 12월 기준 2728만여 명으로 1월보다 30만명 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쉬인 등 세 곳의 중국 이커머스 앱 이용자는 12월 863만명으로 1년 만에 4배 가까이 증가했다.

쿠팡에 맞서는 대형 제조사끼리의 협력도 다방면으로 펼쳐지고 있다. 쿠팡에 납품하지 않는 CJ제일제당은 신세계 계열 이커머스 업체 3곳(이마트몰·SSG닷컴·지마켓), 컬리 등과 공동으로 상품을 출시하고, 쿠팡처럼 익일배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농심·오뚜기·오리온 같은 대형 식품회사도 쿠팡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자사 쇼핑몰을 강화하고 온라인 판매망 확대에 힘을 쏟고 있다. 한 식품업체 관계자는 “국내 시장 점유율만 믿고 고자세를 취하던 쿠팡이 다른 국내 제조사에도 합리적 조건으로 거래를 제안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쿠팡에 납품하는 중소 제조사나 소상공인들의 불만은 여전하다. 한 중소 식품업체 대표는 “LG생활건강 같은 대기업도 애를 먹었는데, 우리 같은 중소 업체는 쿠팡이 납품가를 후려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해도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