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황모(31)씨는 작년 말 줄 서기 대행 업자까지 고용해 백화점 명품관에서 ‘보이 샤넬 플랩백’을 760만원가량 주고 샀다. 한두 달만 들다가 중고 시장에서 비싸게 팔 계획이었다. 최근 1~2년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로 불리는 명품 업체 제품은 리셀(다시 팔기) 시장에 내놓기만 하면 50% 넘는 웃돈에 팔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달 초 황씨가 중고 마켓에서 확인한 ‘보이 샤넬 플랩백’ 가격은 750만원. 제품 정가에 살짝 못 미치는 가격이었다. 황씨는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하고 줄 서기 대행 업자에게 20만원가량을 주고 어렵게 구했는데 리셀 가격이 내려가 허탈하다”고 했다.

최근 리셀 시장에서 샤넬·롤렉스를 비롯한 명품 중고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거리 두기 해제로 국내에서 어렵게 명품을 살 바에야 해외여행을 택하는 이들이 늘어난 데다, 리셀러들이 내놓는 물량까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리셀 가격 하락은 코로나 기간 천정부지로 올랐던 명품 가격 거품이 빠지는 신호탄”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샤넬 되팔아도 본전 못 건져”

20일 명품 중고 거래 플랫폼 크림에서 거래되는 샤넬의 ‘클래식 미디움 플랩백 그레인드 카프스킨&실버 메탈 블랙’ 가격은 1140만원. 지난 1월 5일 1400만원에 거래되던 상품인데 4개월 사이 18.5% 떨어진 것이다.

“실물 구경조차 어렵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로 물량이 부족했던 롤렉스 리셀 가격도 최근 내림세다. 롤렉스 시계 중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으로 알려진 ‘서브마리너 데이트 스틸 블랙’의 크림 리셀 가격은 1818만원이다. 지난 2월에 2090만원에서 13% 떨어졌다. 한창 리셀 가격이 정점일 땐 정가 1100여 만원에 80%가량의 웃돈까지 붙어 팔렸지만 이젠 리셀 가격이 정가와 비슷해졌다.

리셀 시장은 그간 명품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린 장본인으로 꼽혀왔다. 물건을 구입해 쓰다가 시장에 내놓으면 가격이 내려가기는커녕 웃돈까지 붙여 팔 수 있게 되자 리셀 업자들이 명품 매장으로 몰려들었다. 명품 업체들이 한 달이 멀다고 제품 가격을 올렸지만 새벽부터 매장 입구에 진을 치고 줄을 서는 ‘오픈 런’ 현상까지 생겼고, 명품 수요는 줄지 않았다.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 2019년 127억2670만달러(약 16조1692억원) 규모였던 국내 명품 시장은 작년 141억6500만달러(약 17조9966억원)로 10% 넘게 성장했다.

◇오픈 런 줄고 “거품 곧 꺼질 수도”

22일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 샤넬 매장 앞엔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다. 몇 달 전만 해도 수백명씩 줄 서던 풍경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엔 서서히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고 있다. 명품에 쏠렸던 코로나 이후 보복 소비가 여행 등으로 분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소비 감소, 글로벌 경기 침체 탓에 명품 시장 성장 자체가 둔화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의 지난 1분기 명품 매출 증가율은 23~35% 수준으로 전년 같은 기간(35~45%)과 비교하면 성장세가 완만해졌다.

명품 시장 최대 큰손으로 꼽히는 중국이 코로나 봉쇄로 막히자 일부 명품 업체는 심각한 매출 부진을 겪고 있다. 루이비통·디올 등을 보유한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와 구찌의 지난 1분기 중국 매출은 30~40%가량 감소했다. 명품 업체들은 미국·호주 같은 다른 시장에서 판매를 늘려 중국 시장 부진을 만회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이조차도 쉽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가파른 물가 상승으로 소비가 위축되는 등 글로벌 경기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이 크기 때문이다. 한 명품 업체 관계자는 “명품 시장 매출이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을 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빨리 내려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