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 갤러리아 백화점 이스트관. 고가 명품 브랜드가 입점한 4층 전체에서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는 단 한 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건너편 웨스트관도 디자이너 브랜드 서너 개를 제외하면 국내 패션업체 제품은 보이지 않았다. 매장 직원에게 “한국 디자이너 옷은 없느냐”고 묻자 직원은 “해외 브랜드로만 채운 지 한참 됐다”고 말했다.

국내 한 백화점이 최근 재단장한 남성 명품 전문관 모습. 루이비통 같은 해외 명품 업체가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들어섰다. 반면 이곳에 입점한 국내 브랜드는 단 한 개뿐이다. /조선일보 DB

같은 날 서울 반포 신세계백화점 강남점도 상황은 비슷했다. 2~3층 명품 전문 매장 어느 곳에도 국내 업체 제품은 찾아볼 수 없다. 5층에 구색 맞추기처럼 국내 디자이너 상품을 모아 놨으나, 그나마도 가장 규모가 큰 매장은 ‘룰루레몬’ 같은 해외 브랜드가 차지하고 있었다.

국내 주요 백화점이 해외 명품 브랜드 판매에 ‘올인’ 하고 있다. 작년 국내 5대 백화점 70개 점포의 매출은 33조8927억원. 특히 주요 3사는 모두 매출 2조원을 넘기는 역대급 실적을 냈다. 해외 고가(高價) 패션 매출이 가파르게 늘어난 덕이다. 해외 명품 비중을 더 늘리기 위한 백화점 간 경쟁은 올 들어 더 치열해지고 있다.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유치를 위해 해외 업체 출신 임원을 영입하고 수백억 원을 들여 주요 점포를 고치면서까지 허리를 굽히고 있다. 반면 국내 패션 업체들엔 40%가 넘는 수수료를 받으면서도 매장을 구석 자리로 옮기게 하거나 축소·철수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수료는 5~8%만”… ‘에루샤’ 앞에선 쩔쩔

롯데백화점은 작년 3월부터 명동 본점 리뉴얼을 진행 중이다. 해외 명품 비중을 50% 이상으로 올리기 위해서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고급 소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신세계백화점은 경기점(용인)에 명품관을 확장하고 있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은 이미 모두 명품·화장품 전문관으로 바꿨다. 층 전체를 해외 브랜드로 채웠고, 구찌·루이비통 매장도 재단장 중이다. 대전신세계도 구찌·톰포드·피아제를 입점시켰고, 올해 안에 디올·반클리프 아펠·불가리 매장도 열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백화점은 압구정 본점 리뉴얼을 진행하면서 대규모 샤넬 매장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계획이다. 샤넬 매장을 1층과 2층을 통합한 복층으로 만들어 압구정 본점 전체에서 가장 큰 매장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백화점 주요 3사는 명품 업체에 목이 가장 좋은 공간을 내주거나 수수료를 대폭 깎아주고 있다. 백화점이 해외 명품 업체에 받는 수수료는 10% 정도. ‘에루샤’ 급은 그보다 더 낮은 5~8% 정도만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정 행사 기간에 목표 판매액을 넘기면 수수료를 더 깎아주거나, 각종 마케팅·관리비용까지 감면해주는 경우도 있다. 국내 업체에 통상 30~40%대 수수료를 받는 것과 대조된다. 한 명품업계 관계자는 “백화점 3사가 경쟁적으로 파격적인 입점 조건을 내거니까 오히려 입점을 주저하게 될 정도”라고 말했다.

◇밀려나는 국내 패션 업체들

반면 국내 패션 업체들은 점점 더 입지가 줄어들고 있다. 작년 말 재단장을 마친 롯데백화점 본점의 3층 여성 패션관에 국내 브랜드가 하나도 없다. 5층 남성매장에도 국내 브랜드는 한 개뿐이다. 지하 1층에 있던 국내 핸드백 매장은 아예 9층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핸드백 매장은 재단장 일정 때문에 임시로 9층에서 영업을 한 것일 뿐 아예 자리를 옮긴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대백화점 압구정 4층에선 빈폴·헤지스가 최근 매장을 철수했다.

매장을 유지하고 있는 업체들도 좌불안석이다. 백화점이 점포 리뉴얼을 하면서 구석 자리로 옮길 것을 종용하거나, 철마다 최소 4000만~5000만원씩 들여 인테리어를 바꿀 것을 주문하기 때문이다. 수수료는 계속 오르는 추세다. 일부에선 40%를 넘어 50%에 가까운 수수료를 내는 경우도 있다. 국내 남성복 디자이너 브랜드 ‘카루소’의 박성목 실장은 “백화점이 해외 명품 업체엔 몸을 낮추고 수수료를 깎아주면서 그 손실을 사실상 국내 업체에 전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백화점 업계는 고객들의 소비 패턴이 고급화되면서 명품 중심으로 매장을 재편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중소 패션 업체 대표는 이에 대해 “대기업 유통점이 대부분 중소기업인 국내 업체들을 지원해주기는커녕 거꾸로 역차별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