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본지가 리더스인덱스에 의뢰해 분석한 결과, 지난달 주총에서 신규 선임을 제안한 30대 그룹 71사의 사외이사 107명 중 판·검사와 고위 관료 출신이 44명(41.4%)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24.3%)의 두 배 수준이다.

44명 중 8명이 검찰 출신으로 가장 많았고, 법원과 국세청 출신이 각 6명, 산업통상자원부 5명, 금융위 4명, 국토부 3명, 기재부 2명 순이었다. 반면 기업 CEO 등 재계 인사 출신은 19명으로 17.8%에 그쳤다.

최근 남구준 전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이 ‘사교육 카르텔’ 수사를 받는 메가스터디 사외이사로 영입되고, 지난해 포스코 이사회의 ‘캐나다 호화 이사회’가 논란이 된 가운데, 기업들이 전문성이 떨어지는 관료나 권력기관 출신을 선호하는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픽=이철원

◇기형적인 사외이사 분포

HD현대그룹은 새 사외이사 5명 중 4명을 장관이나 검사장 등 고위 공무원 출신으로 뽑았다. 건설 기계 사업을 하는 계열사가 전직 산업통상부 장관을, 태양광 사업을 하는 계열사가 전직 검사장을 선임해 업무 관련성이 낮다는 지적이다.

삼성그룹은 신규 사외이사 18명 중 13명을 판·검사, 관료 출신으로 채웠다. 삼성물산과 삼성화재는 전직 고위 검사를, 삼성전자는 전직 금융위원장을 선임했다. 이 밖에 롯데·효성·에쓰오일 등이 신규 사외이사 절반을 판·검사, 관료 출신으로 영입했고, 최근 전직 대표가 수사받고 있는 한 자동차 기업 계열사도 처음 전직 검사를 영입했다.

고위 관직 출신에 수요가 쏠리다 보니, 전혀 다른 업종의 기업 2곳에서 사외이사를 겸직하는 이도 많다.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지낸 한 인사는 지난달 IT 회사와 소재 기업의 사외이사로 동시 선임됐다. 한 전직 국토부 장관은 조선 업체와 바이오 회사의 사외이사를 겸직한다. 이렇게 두 곳을 맡은 사외이사가 50대 그룹에서 86명이었다(CXO연구소, 2023년 말 기준).

미국 등 해외 주요 기업은 주로 CEO 출신을 선임한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2015년 포천 100대 기업 사외이사를 전수조사한 적이 있는데, 74%는 재계·기업 출신이고, 고위 관료 출신은 10%에 불과했다”고 했다.

규제 때문에 기업인 출신 사외이사 선임을 꺼린다는 의견도 있다. 기업인들이 사외이사로 활동하면서 독립 사업체를 설립할 경우, 공정거래법에 따라 대기업 계열사로 편입돼 각종 규제를 받는다는 것이다. 유정주 한경협 팀장은 “이런 문제를 일일이 신경 쓰기 번거로워 관료나 학자 출신을 선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전 설명회’ 필요한 이사회

업무 전문성이 부족한 사외이사들을 영입하다 보니, 토론도 없고 반대도 없는 ‘거수기’ 이사회를 초래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요즘 대기업 IR팀에서는 업종이나 경영 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외이사들을 위한 ‘사전 설명회’가 보편화돼 있다. 사전 설명회를 통해 미리 안건을 설득하다 보니, 이사회에선 토론 없이 ‘찬성’ 몰표가 나온다는 것이다. 두 차례 사외이사 경험이 있는 한 교수는 “내 분야에서는 전문가이지만, 기업 경영 사안은 잘 알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사전 설명회가 없으면 자료만 보고 회사의 이슈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