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그룹은 지난 1일 ㈜두산 지주 부문 내에 ‘그룹포트폴리오 총괄’을 신설하고, 김도원(52)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서울 대표를 사장으로 선임했다. 김 사장은 약 25년간 컨설팅 회사에서 에너지 사업 부문을 담당해 왔다. 그는 두산에너지 분야의 M&A(인수·합병)를 총괄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달 28일에는 맥킨지 컨설턴트 출신의 정형락(52) 사장이 두산의 핵심 계열사로 떠오르고 있는 두산퓨얼셀 대표로 선임됐다. 수소 등 신사업을 추진 중인 두산이 핵심 보직에 잇따라 컨설턴트 출신을 영입한 것이다.

/그래픽=박상훈

컨설턴트 출신들이 대기업 CEO로 대거 자리를 옮기고 있다. 링 밖에서 조언을 하던 코치가 속속 링 위에 올라 선수로 뛰고 있다. 헤드헌팅 업체 유니코써치의 김혜양 대표는 “올해는 컨설턴트 출신을 찾아달라는 기업들의 의뢰가 전년 대비 30~40% 증가했다”고 말했다.

◇링 밖의 코치에서 조직의 수장으로

LG그룹에는 지주회사인 ㈜LG에 베인앤드컴퍼니 대표 출신의 홍범식(53) 사장이 있다. 그는 구광모 회장의 취임 첫해인 2018년 연말 사장단 인사 때 영입됐다. 홍 사장은 지주회사인 ㈜LG의 경영전략팀장을 맡아 그룹 사업포트폴리오를 짜고 M&A 사업성을 검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재계 인사는 “LG그룹에서 외부 인사가 미래전략수립을 맡는 것만으로도 파격적”이라며 “LG그룹 안팎에서는 컨설턴트들이 더 영입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고 말했다.

맥킨지를 거쳐 액센추어 한국 대표를 역임한 현대차그룹 지영조(62) 사장도 미래 성장 동력 발굴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동남아 최대 차량 호출 서비스 ‘그랩’ 투자 등을 이끌며 정의선 회장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사업 축이 급변하고 있는 유통 업계에서는 컨설턴트 출신 CEO들의 등용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이마트는 창립 이래 첫 분기 영업적자를 기록한 2019년 연말 인사에서 강희석(52) 베인앤드컴퍼니 파트너를 대표로 선임했다. 회사 창업 26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 인사를 최고경영자로 영입한 것. 컨설턴트로 10여 년간 이마트 경영 자문을 맡았던 강 대표는 구원투수로 등판해 네이버와 2500억원 규모의 지분 교환, 이베이코리아 인수 등을 주도했다.

보수적 기업 문화인 롯데그룹도 최근 컨설턴트 출신을 잇따라 영입하고 있다. 롯데쇼핑은 지난해 10월 헤드쿼터(HQ) 경영전략실장으로 보스턴컨설팅그룹 출신 정경운(49) 상무를 영입한 데 이어, 11월엔 같은 컨설팅 회사 출신인 강성현(51) 롯데네슬레코리아 대표를 롯데쇼핑 마트사업부장으로 임명했다. 재계에선 “내부 출신을 중용해온 롯데엔 이례적인 일”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롯데쇼핑은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강 대표를 사내이사로 선임해 힘을 실어줬다. GS리테일도 베인앤드컴퍼니 출신의 박솔잎(50) 전무를 영입해 신사업을 발굴하는 전략본부장을 맡겼다.

◇과감한 변화·신사업 발굴에 적임자… 현장 감각 부족하다는 비판도

주요 대기업이 글로벌 컨설턴트 출신들을 중용하는 것은 그만큼 미래 먹거리 발굴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헤드헌팅 업체인 패스파인더의 김재호 대표는 “코로나 사태 이후 사업의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지난해부터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컨설턴트 인력 영입 움직임이 많아졌다”며 “컨설턴트들은 디지털 전환 등 글로벌 트렌드에 한발 앞서 있고,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서 전략을 짜는 데 익숙하다는 강점이 있다”고 말했다.

재계의 세대교체 움직임도 맞물려 있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주요 대기업 오너들이 경영 전면에서 나서면서 외부 영입 인사를 통해 자신의 경영 색깔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주요 기업 젊은 오너들이 젊은 컨설턴트 출신들을 영입해 조직에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세대교체를 꾀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컨설턴트 출신들은 현장 감각이 부족하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약하다”는 비판적 의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고위 인사는 “컨설턴트들은 프레젠테이션은 잘하지만 현실 감각과 업(業)에 대한 디테일 등 실무 능력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있다”며 “과거 컨설턴트를 중용했던 몇몇 대기업이 기업 경영의 주요 변곡점에서 오히려 실패했던 사례도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