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6월 9일 포항 제1고로(高爐·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오자 박태준(가운데) 당시 포항종합제철 사장과 임직원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포스코 제공

국내 최장수 고로(高爐·용광로)이자 전 세계에서 최장 기간 조업 중인 포스코 ‘포항 1고로’가 올해 은퇴한다. 포항 1고로는 1973년 6월 9일 첫 쇳물을 쏟아낸 것을 시작으로 50년 가까이 쇳물을 생산해왔다. 1고로를 시작으로 지금은 9개로 늘어난 포스코 고로는 한국 제철 산업과 중공업의 젖줄 역할을 해왔다. 철강 업계 고위 관계자는 “1고로는 그동안 두 차례 개수(改修) 작업을 통해 버텨왔기 때문에 언제 폐쇄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역사적 상징성이 워낙 커 포스코 최고경영진은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철강역사박물관으로 만드는 방안이 가장 유력하다”고 말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포항제철(현 포스코) 제1고로가 첫 쇳물을 쏟아내고 있다. 가발 등을 수출하던 한국에서 '산업 철기 시대'를 열었던 1고로는 50년 가까운 활동을 마치고 올해 은퇴할 예정이다. /포스코

◇은퇴하는 한국 경제의 산증인, 철강역사박물관으로 추진

1973년 6월 8일 처음으로 불을 지핀 1고로는 이튿날부터 쇳물을 쏟아냈다. 당시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으로 1고로 건설에 나섰던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조상의 핏값으로 짓는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한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고 말할 만큼 비장한 각오였다. 국내 철강 업계는 1고로에서 첫 쇳물이 생산된 6월 9일을 ‘철의 날’로 지정해 기념식을 열어왔다. 여기서 생산된 쇳물로부터 대한민국 중공업이 시작됐다. 당시 김학렬 부총리가 정주영 현대사장에게 ‘포항제철 철강으로 배를 만들어보라’고 권유했고, 정 사장은 독(dock·배를 만드는 거대 공간)과 선박을 동시에 만드는 방식으로 조선 산업을 일으켰다. 자동차 산업, 건설업, 기계 공업도 철강 산업의 밑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산업계에서는 “1고로는 합판·스웨터·가발을 수출해 밥술을 뜨던 한국에 ‘산업 철기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한다.

섭씨 1000도 넘는 고온을 견뎌야 하는 고로는 통상 15년 이상 수명을 유지하기 힘들지만, 1고로는 개보수 작업을 통해 수명을 연장해왔다. 포스코는 당초 2017년 1고로의 종풍(終風·고로가 수명을 다하고 쇳물 생산을 마치는 과정)식을 거행하려고 했다. 연간 500만t 이상의 쇳물을 생산하는 초대형 고로가 여럿인 포스코에서 생산 쇳물이 130만t에 불과한 1고로는 경제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1고로가 가진 역사적 상징성과 철강 제품 수요 회복으로 은퇴 결정이 번복됐다.

포스코가 이번에 1고로 은퇴를 결정한 것은 포스코의 넷제로(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제로로 감축) 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오래된 고로이다보니, 쇳물을 생산할수록 이산화탄소도 많이 배출되기 때문이다. 포스코는 올해 은퇴하는 1고로를 철강역사박물관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하며, 해외 사례 등을 검토하고 있다. 멕시코의 주요 공업 도시인 몬테레이에는 1900년대에 세워진 고로가 외형은 그대로 유지한 채 철강 박물관으로 전환됐고, 1800년대 후반부터 유럽 철강산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독일 푈클링겐 제철소도 옛 모습을 보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선례가 있다. 포스코 측은 “해외 사례와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1고로 최종 활용 방안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탄소 중립 시대, 처지 뒤바뀐 전기로와 고로

최근 환경 이슈가 급부상하면서 기술력과 자금력의 상징이었던 고로들은 생산 현장에서 밀려날 처지다. 고로는 철광석, 코크스 등의 원료에서 직접 쇳물을 뽑아내기 때문에 원가 경쟁력이 높고 자동차 강판, 배를 만드는 후판 등 다양한 철강 제품을 만든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석탄을 가공해 만든 코크스가 주원료로 쓰이기 때문에 탄소 배출량이 많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전기를 이용해 고철을 녹여 철강 제품을 만드는 전기로는 원가 경쟁력은 고로보다 떨어지지만 탄소 배출량은 고로 공법의 20~25%에 불과해 최근 친환경적인 제철 공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100% 고로로 철강 제품을 생산해온 포스코 입장에서는 전략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120년 역사를 가진 미국 대표 철강회사인 US스틸도 최근 고로 운영을 중단했고, 전기로 투자를 늘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