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왼쪽) 현대차그룹 신임 회장이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에 참석해 그룹의 미래 모빌리티 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앞에 놓인 비행체 모형은 현대차가 2028년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 중인 도심 항공기 콘셉트 모델. /현대차그룹

“사랑받는 기업이 되겠다.”

14일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의 취임사에는 평소 강조해 온 경영 철학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그는 아버지 정몽구 명예회장이 강조했던 ‘품질 경영’을 이어받는 한편, ‘고객 경영’을 덧붙여 강조해왔다. 지난 2018년 9월 수석 부회장 승진 후 고객 가치를 강조한 책을 직원들에게 선물하며 “어떻게 하면 고객이 우리 차를 사줄까만 고민했던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날 취임사에서도 “우리 모든 활동은 고객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평소 “단순히 차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인류 행복에 기여하는 존경받는 기업이 되자”고 말했다. 이날 취임사에서 그는 “'자유로운 이동과 평화로운 삶'이라는 인류의 꿈을 실현하고 그 결실을 나누면서 사랑받는 기업이 되자”고 했다.

그는 이날 할아버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아버지 정몽구 명예회장뿐 아니라 ‘포니 정’이라 일컫는 작은 할아버지 정세영 전 현대차 명예회장과 그의 아들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 회장, 김철호 기아차 창업 회장을 언급하며 그간의 업적에 감사를 표했다. 국산 순수차 ‘포니’ 개발을 주도해 현대차 초창기 기틀을 닦았지만, 1999년 정몽구 회장에게 현대차 경영권을 내줘야 했던 정세영 전 회장 부자까지 챙긴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가족 간 우애를 중시하고 도리가 무엇인지 아는 정의선 회장의 성품이 드러난다”고 해석했다.

◇엄격한 가정 교육 받으며 ‘겸손한 카리스마’ 키워

정 회장을 만나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겸손하다”고 말한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며 “하지만 대기업 최고경영자로서 아랫사람을 다루는 카리스마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서울 청운동 할아버지(정주영 창업주) 자택에서 현대가의 ‘밥상머리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매일 오전 5시 가족과 식사하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 자신을 낮추면서 남을 높이는 기본 예절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아버지에게도 엄격한 훈육을 받았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아버지를 꼽는다. 그는 2018년 수석 부회장에 오른 뒤에도 서울 양재동 본사 사옥 1층 정문과 로비를 통해 출근하지 않았다. “1층은 아버지가 다니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은 지하 주차장 통로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꽃길' 아닌 ‘험지’ 다녀

“여기서 나를 걸겠다. 지금 도망치면 어디로 가겠느냐.”

사내에선 정의선 회장이 ‘낙하산 오너’가 아니라 ‘진짜 경영인’임을 인정받은 결정적 사건이 전해진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하나뿐인 아들을 ‘꽃길’이 아니라 ‘험지’로 보내 경영 능력을 시험했다. 2005년 적자에 허덕이던 기아차 사장으로 보낸 일이 대표적이다. 당시 기아차는 SUV 시장 위축에다 환율 하락까지 겹쳐 최악 시기를 맞고 있었다. 기아차 실적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자 일부 임원은 당시 정의선 사장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고 한다. 오너 3세가 ‘경력 관리’에 실패하면, 나중에 승계 정당성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란 우려였다. 그러나 정 회장은 당시 임원 회의에서 “나를 걸겠다”고 선언했다. “절대 도망가지 않겠다. 한번 도망가면 다음에 또 그렇게 된다”고도 했다. 그는 이후 피터 슈라이어 아우디 수석 디자이너를 직접 찾아가 영입, 기아차를 ‘디자인 경영’으로 살려냈고, 임원들은 그때부터 그를 다시 보게 됐다.

2009년 현대차 부회장을 맡았을 때에도 ‘금융 위기’의 파고를 현명하게 이겨냈다. 미국 시장을 발로 뛰던 정 회장은 ‘구매 후 1년 내 실직하면 차를 되사주는’ 파격 보증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이때 현대차는 해외시장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2010년 최초로 ‘현대·기아차 세계 5위’를 달성했다.

하지만 정의선 회장 앞에는 또 다른 험로가 예고돼 있다. 내연기관차에서 친환경 자율주행차로 바뀌는 자동차 산업 대전환기에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완성차 업계는 치열한 생존 경쟁에 들어갔다. 첨단 전기차로 무장한 테슬라는 기존 완성차 시장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고, GM·폴크스바겐 등은 발 빠른 구조조정에 돌입하며 미래차 투자에 올인하고 있다. 현대차는 전기차·수소차 병행 전략을 취하며, 모빌리티 서비스 설루션 업체로 변신하기 위한 다각적 투자를 하고 있지만 모두 성공시키기엔 난관이 상당하다. 정 회장은 이날 취임사에서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면서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환경 자율주행차를 개발하고 로보틱스·UAM(도심 항공 모빌리티)·스마트 시티도 빠르게 현실화시키겠다”고 했다. 현대차 고위 관계자는 “현대차는 ‘판이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 기회를 잡아 한 단계씩 도약한 경험이 있다”며 “이번 위기도 정의선 회장의 새로운 리더십을 발판으로 돌파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