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자국 투자자들이 중국 첨단 산업 분야에 투자하는 것을 금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수년간 미·중은 각종 수출 규제와 맞불 보복조치로 최악의 기술 경쟁을 벌여왔지만, 미국계 사모펀드(PE)와 벤처캐피털(VC)의 대중(對中) 투자는 여전히 물밑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중국 전문가들은 “규제의 칼날이 투자업계로까지 번진 것은 미국이 자국 금융 기업·기관들의 손실을 감당하면서라도 중국과 완벽하게 ‘디커플링(분리)’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3일(현지 시각)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잠재적 적국의 하이테크 산업에 대한 미국의 자본 투자를 제한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보도했다. WSJ가 입수한 미 재무부와 상무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두 부처는 미국에 국가안보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 대외 투자를 금지하는 규제안 준비에 착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명시적으로 중국을 투자 금지국으로 겨냥하진 않았지만, 미 정부 관계자들은 ‘사실상 중국의 기술 발전을 억누르기 위한 조치’라고 입을 모은다. WSJ는 소식통을 인용해 “특히 첨단 반도체·양자 컴퓨터·인공지능(AI) 등 중국 군사기술 발전에 도움을 주는 분야에 투자 금지 규제가 적용될 것”이라며 “양국의 기술 경쟁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고 평가했다.

◇끝을 향한 미 자본과 중 기업의 밀월기

거대한 미국 자본과 높은 성장성을 지닌 중국 하이테크 기업들은 2000년대 후반부터 긴 밀월기를 가졌다. 중국 기술 스타트업들은 미국 자본을 등에 업고 공격적으로 시장을 개척하며 성장했고, 미국 투자사들은 이들 기업의 IPO(기업공개)로 막대한 투자이익을 돌려받는 식이었다.

실제로 미국 자본은 중국의 테크 기업을 지탱하는 ‘큰손’들이다. 이른바 ‘BAT’로 불리는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의 10대 주주명단에는 뱅가드그룹, 블랙록,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와 같은 미국계 금융·투자 기관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글로벌 최대 숏폼 소셜미디어인 ‘틱톡’을 운영하는 바이트댄스의 주요 주주 역시 미국계인 세쿼이아캐피털 차이나와 KKR이다. 사실상 미국 자본을 받지 않고 성장한 중국 빅테크 기업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미·중 무역 경쟁이 심화되면서 이런 불변의 밀월기에도 균열이 일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S&P글로벌의 자료에 따르면 2022년 미국 PE·VC들의 대중 투자 총액은 70억2000만달러(약 9조원)로 전년(약 38조원) 대비 76% 급감했다. 투자 건수도 2021년 346건에서 2022년 208건으로 40% 하락했다. 미국계 자본들이 중국에 투자할 돈을 인도·동남아시아 스타트업에 투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발 투자가 급감하면서 지난해 중국 스타트업이 유치한 투자금 총액도 전년 대비 반토막이 났다. 그만큼 미국 자본에 대한 중국 스타트업들의 의존도가 높다는 것이다.

◇중국 스타트업계, “줄도산 면치 못할 것”

중국 현지에선 벌써부터 “투자가 많이 줄어든 상황에서 미국의 투자 금지안까지 현실화되면 문을 닫는 스타트업들이 속출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국 컨설팅 업체 사이존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스타트업에 가장 많은 투자를 진행한 것은 미국계 투자사인 세쿼이아캐피털 차이나였다. 지난 2018년부터 시드펀드를 조성해 5년 동안 중국 초기 스타트업 300여곳에 투자한 이 회사는 지난해 7월 대중 투자를 위한 신규 기금을 만들기 위해 총 90억 달러(약 12조원)를 조달했다. 하지만 미국의 규제가 현실화된다면 이 자금들이 실제 투자처로 전달되기 전에 회수되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미·중 기술 경쟁이 집중된 AI·반도체·클라우드 등 첨단 산업 분야는 기술 돌파를 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자금을 태워야 하는 분야다. 한 중국 투자업계 관계자는 “미국 자본이 전부 끊기게 된다면 중국계 자본은 이미 성과를 내고 있는 기업을 살리는 데 쏠릴 것이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자금 고갈 상태가 될 것”이라며 “중국의 기술 굴기의 싹을 자르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했다.

반면 미국 투자자들에게도 악영향이 미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 자본들은 중국 대신 투자처를 동남아시아·아랍 쪽으로 선회하고 있지만, 이들 시장의 스타트업들은 첨단 테크 기술 기반이 탄탄한 중국에 비해 아직은 설익은 편이라는 것이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미국 투자자들이 중국을 대체하는 매력적인 투자처를 새로 발굴하는 것도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