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3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 거시경제 금융회의 브리핑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뉴시스

정부가 23일 자금 시장 경색을 막기 위해 ‘50조원+α’를 긴급 투입하기로 결정했지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정부의 자금 시장 안정 방안은 미시적인 조치라서 거시적인 통화정책 운영에 관한 전제조건이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기준금리 인상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이 총재의 설명이 일리가 있지만, 한은이 딜레마에 빠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은이 작년 8월부터 1년 2개월간 기준금리를 0.5%에서 3%로 끌어올리며 돈줄을 빠르게 조여왔지만, 채권시장 불안을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시중에 풀리기 때문이다. 한은은 둑을 쌓고, 정부는 둑을 허무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감세안을 추진하다 철회하고 취임 44일 만에 총리가 사임한 영국과 닮은꼴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영국 정부는 9월 말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 국채 가격이 폭락했고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약 105조원 규모로 긴급 국채 매입에 나서야 했다. 물가 상승을 누르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던 영란은행이 채권시장 마비를 막기 위해 급하게 돈을 푸는 상충되는 정책을 펼친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영국의 경우는 총리가 독단적이었지만, 이번 조치는 정부와 한은 협의가 있고 연착륙 대책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돈을 풀어달라는 시장의 요청이 이어질 수 있어 한은의 고민은 커질 수 있다. 시장 경색을 푸는 데 한은이 적극적으로 움직여달라는 요구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나재철 금융투자협회장은 지난 18일 이창용 한은 총재를 만나 ‘금융안정특별대출’을 재가동해달라고 요청했다. 금융안정특별대출은 증권사·은행·보험사 등으로부터 한은이 회사채를 담보로 받고 대출해주는 제도로서 비상시 유동성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한은은 금융안정특별대출을 코로나 사태 당시 한시적으로 가동한 적 있다. 이 제도를 다시 시행할지에 대해 한은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만큼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며 답을 미루고 있다. 이 총재로서는 정부나 시장의 요청을 외면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전부 수용하기도 어려운 입장이다. 한은 내부에서는 “시장이 어려울 때마다 매번 한은이 나서는 건 부작용이 클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