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명동점 딜링룸 전광판에 달러·원 환율이 전 거래일 대비 22.0원 오른 1,431.3원을 나타내고 있다./뉴스1

26일 원·달러 환율이 1430원대로 급등하면서 금융시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환율이 상승(원화 가치 하락)하는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1월 초 1200원을 넘어선 뒤 1300원에 도달한 6월 23일까지는 168일이 걸렸지만, 이후 1400원(9월 22일 1409.7원)까지는 91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불과 2거래일 만에 1430원 선까지 치솟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들어 22일까지 원화 가치는 22.9% 하락해 2001년 닷컴 버블 붕괴 시기(-16.6%)와 2020년 코로나 확산기(-10.1%)보다 낙폭이 컸다.

전문가들은 달러 쏠림 현상이 강해지면서 향후 환율이 10원, 20원 단위로 계단식으로 급등하는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한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달러당 1450원 돌파는 시간문제이고 1500원 가능성도 열어둬야 한다”고 말했다.

◇환율, 물가, 가계 부채까지 ‘트릴레마’

이날 원화 가치가 추락한 이유는 영국의 파운드화 투매로 ‘킹(king) 달러’ 현상이 두드러지며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23일 영국 정부는 50년 사이 최대 규모인 450억파운드(약 70조원)에 달하는 감세(減稅) 방침을 밝혔다. 이에 따라 영국의 재정 파탄을 우려한 투자자들이 영국 국채를 투매했다. 파운드화 가치는 26일 한때 1파운드당 1.04달러까지 밀려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기존에는 1.05달러(1985년 2월)가 최저치였다.

26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코스피와 원·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이날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전 거래일 대비 22원 오른 1431.3원에 마감했다. 2009년 3월 16일(1440원) 이후 약 13년 6개월 만의 최고치다. 코스피 지수는 3.02% 하락한 2220.94로 거래를 마치며 2020년 7월 27일(2217.86) 이후 2년 2개월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남강호 기자

준(準)기축통화인 파운드화가 무너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달러 선호 심리가 확산됐다. 주요 6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인 달러 인덱스가 25일 한때 114선까지 오르며 20년 4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랐다. 이렇게 달러가 일방적 독주를 하다 보니 원화 값도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이다.

하지만, 이날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은 전날보다 1엔가량 오른 143엔대에 거래돼 원화와 대조를 이뤘다. 엔화가 준기축통화이고, 지난 22일 일본은행이 엔화 가치를 높이기 위해 24년 만에 대규모 시장 개입을 한 효과 등을 감안하더라도 원화 가치의 하락 폭이 두드러진다.

서정훈 하나은행 연구위원은 “사상 최대인 무역 적자에 대한 우려가 원화 가치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며 “다른 선진국은 환율과 물가 두 가지를 고민하지만, 우리는 심각한 가계 부채까지 고려해야 하는 ‘트릴레마(삼중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25일 “환율을 안정시키려면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가계 부채 부담이 커지는 문제도 있다”고 말한 것이 원화 값 방어에 악재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은 가계 부채 문제에 가로막혀 금리를 크게 올리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퍼졌다는 것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6일 국회에서 한미 통화 스와프와 관련한 질의를 받고 “통화 스와프와 관련해 미국 연방준비제도와 정보 교환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고 했다.

◇블룸버그 “‘제2의 아시아 외환 위기’ 우려”

블룸버그통신은 25일 “달러가 초강세를 보이는 사이 아시아 대표 통화인 위안화와 엔화의 가치가 급락하고 있어 ‘제2의 아시아 외환 위기’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원화와 필리핀 페소, 태국 바트를 취약한 통화로 꼽았다. 짐 오닐 전 골드만삭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엔화가 달러당 150엔을 돌파하면 서구 자본이 아시아에서 대거 이탈하는 방아쇠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올해 국제통화기금(IMF)이 전 세계에 제공한 구제금융이 역대 최대 규모라고 보도했다. FT는 “올 들어 8월까지 IMF가 각국에 제공한 차관은 44개 프로그램에 모두 1400억달러(약 200조원)에 달했다”며 “합의 후 아직 제공하지 않은 차관까지 포함하면 2680억달러(약 383조원)를 넘는다”고 했다.

IMF가 빌려준 돈이 역대 최대라는 건 신흥국들의 부채 부담이 과거 어느 때보다 커졌다는 뜻이다. 미국과 주요 선진국이 금리를 빠르게 올리자 신흥국에 투자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와 선진국으로 되돌아가고 있어 일부 신흥국은 이미 외화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와 관련, IMF의 대출 여력이 조만간 한계에 다다를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IMF가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내기가 어려워지면 적지 않은 나라에서 ‘부채 폭탄’이 터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