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 업체에서 받은 연 17%대 고금리 대출로 골치를 썩던 20대 직장인 진모씨는 지난 5월, ‘서민금융진흥원 김민재 팀장’이란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주거래 은행과 주민번호, 은행 본인 확인용 인증 번호 등을 물어보더니 “신용 점수를 조금만 더 올리면 주거래 은행에서 3550만원까지 연 2.6% 금리로 대환 대출이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주거래 은행 로고가 들어간 대출 시뮬레이션 화면도 캡처해 보내왔다.

그러면서 “신용 점수를 올리는 작업을 하려면 최소 3~5일이 걸린다”며 “일단 계좌 잔액을 0원으로 비워두고, 우리와 이중 로그인이 되면 안 되니 그때까지는 은행 앱에 접속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진씨는 다소 미심쩍었지만, 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데다 이미 금융권 추가 대출이 막힌 상황이어서 “손해 볼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6월 초, 진씨는 주거래 은행에서 거래 내역을 확인하는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5월 23일부터 6월 8일까지 17일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총 4146건의 입·출금이 발생한 것이다. 2095명이 ATM(현금자동인출기)으로 100만원씩을 입금하면 2~3초 안에 전액 출금하는 방식으로 총 29억400만원이 진씨 통장을 거쳐 빠져나갔다. 진씨는 입·출금 알림 서비스를 받고 있지 않아 이런 거래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수사 당국은 보이스피싱 일당이 피해자들로부터 가로챈 현금을 ATM 1회 입금 한도(100만원)에 맞춰 쪼개기로 진씨 통장에 넣고 세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씨 통장이 보이스피싱을 위한 대포통장으로 활용된 것이다. 진씨는 “금전 피해를 본 것은 없지만, 내 계좌에서 나도 모르는 깜깜이 거래가 수천건 이뤄졌다는 게 황당하다”며 “그런데도 경찰은 오히려 공범으로 의심해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보이스피싱 수법이 날로 교묘해지고 있다. 이전에는 주로 계좌에 들어 있는 현금을 빼앗아 달아나는 방식이었다면, 요즘은 대출을 미끼로 금융 정보를 알아낸 뒤 피해자 계좌를 현금 수거용 대포통장으로 쓰는 수법까지 등장하고 있다. 금융 당국의 예방 활동 강화로 계좌 이체형 보이스피싱은 물론, 대포통장 구하기도 쉽지 않게 되자 대출자를 꾀어 계좌를 뺏어 쓰는 것이다.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19개 은행에서 금융 사기에 이용된 계좌(대포통장)는 2만2369건으로 이미 작년 한 해 치 적발 건수(3만8013건)의 58%를 넘어섰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이런 경우 계좌 피해자가 현금을 빼앗긴 것은 없지만, 대포통장 계좌로 이용된 이력이 전체 은행권에 공유돼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윤 의원은 “현재 은행권에서는 사기이용계좌를 통한 금융거래가 이뤄지지 못하도록 이상금융거래탐지시스템(FDS)을 구축하여 운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유형의 보이스피싱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라며, “범죄에 이용되는 금융거래 패턴의 진화에 대응해 금융권도 최신 불법 금융거래 패턴을 분석하여 이상금융거래탐지시스템에 적용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