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학계의 거목(巨木)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23일 별세했다. 사진은 2014년 10월 ‘경제학원론’ 발간 40주년을 맞아 ‘소천서사(少泉書舍)’현판이 걸린 자택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이덕훈 기자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23일 94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서울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치료받고 있었다. 192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상과대 전문부를 졸업했다. 6·25전쟁 때 육군 통역 장교와 육군사관학교 교관 등으로 군에 복무했다. 종전 후엔 미국으로 유학해 UC버클리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8년 귀국해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20년 넘게 재직했다. ‘조순 학파’로 불릴 만큼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74년 케인스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교과서인 ‘경제학 원론’을 펴냈다. 이 책은 정운찬 전 국무총리, 전성인 홍익대 교수, 김영식 서울대 교수 등이 차례로 개정판 공동 저자로 참여하면서 40년 넘게 대표적 경제학 교과서로 자리 잡았다.

고인은 육사 교관 시절 제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88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았다. 1992년에는 한국은행 총재에 임명됐지만, 중앙은행의 독립성 문제를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1년 만에 사표를 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해 1995년 제1회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취임 직전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에서 시장 취임식을 열어 화제가 됐다. 아스팔트로 덮여 있던 여의도 광장을 여의도공원으로 조성한 것이 대표적 업적이다. 1997년 꼬마 민주당 대선 후보로 영입돼 대선에 도전했지만,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단일화했다. 그 뒤 한나라당 총재를 맡았다.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을 손수 지었다. 1998년 강원 강릉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 민주국민당 대표로 지휘한 16대 총선 참패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엔 서울대, 명지대 명예교수와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한반도선진화재단 고문 등을 맡았다.

‘백미(白眉)’라는 고사에 딱 들어맞는 길고 흰 눈썹은 고인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산행을 즐긴 까닭에 ‘산신령’이라는 별명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저녁 늦게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제자인 한덕수 국무총리도 빈소를 찾아 “시장에 대해 직접 규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교수님의 학자적 소신이었고, 저도 일생 동안 경제학을 하면서 머릿속에 많이 들어있던 말씀”이라고 했다. 고인의 비서관을 지낸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한민국 경제가 갈림길에 있을 때마다 기본에 충실하며 바르게 갈 수 있는 정책을 늘 고민하셨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애도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개인적으로는 제게 가르침을 주신 스승이시기도 하고, 지금 한국 경제가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서 고인이 주신 여러 지혜를 다시 새겨보고자 한다”고 했다. 지난달 고인과 맺은 인연을 담은 ‘나의 스승, 나의 인생’을 펴낸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55년간 모신 하늘 같은 스승, 인생의 나침반 역할을 해주신 선생님을 더 이상 못 뵙게 되다니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고인과 정치 생활을 함께했던 정치인들도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서울대 경제학과 제자인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은 “고인은 부총리, 총재보다는 내게 ‘선생님’으로 더 크게 남아있다. 워낙 인품이 원만한 데다가 정책적으로도 지식이 풍부한 분이다 보니까, 국회 입성 후 여야를 달리해 만나도 사실 마땅히 문제를 지적하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고인이 한나라당 총재를 맡았을 때 비서실장을 지낸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는 “개인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국가 차원에서 또 철학적 차원에서 나라의 길을 위하는, 그렇게 큰 어른이었다”고 했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서울시장에 당선되고 점심 식사를 사주겠다고 해 으레 좋은 것을 사줄 줄 알고 만나러 갔는데, 서울시청 구내식당에 데려갔다. 그렇게 청렴하고 곧은 어른이었다”고 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김남희(92)씨와 아들 기송, 준, 건, 승주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고, 발인은 2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