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실업, 소득격차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가적으로 2030년까지 시가총액 100조(兆)원짜리 기업 10개를 세운다는 목표 아래 대학을 ‘혁신 허브’(innovation hub)로 바꾸어야 합니다.”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장.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 초대원장을 지냈다. 그는 독일계 글로벌 기업 SAP과 'SAP HANA(하나)' 개발을 공동 지휘했다./송의달 기자

차상균(63)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 원장이 이달 20일 기자에게 한 말이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인재 양성을 목표로 2020년 3월 세워진 대학원의 초대 원장인 그는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인재를 양성해 사회를 미래로 이끄는 첨단 플랫폼인 대학들이 규제와 통제의 사슬에 꽁꽁 묶여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12억원 서울대 기부...글로벌 ‘교수·기업인’

메모리 반도체 기반의 고성능 빅데이터 처리 원천 소프트웨어 기술을 개발한 차 원장은 2000년 서울대 학내에서 벤처기업 ‘TIM(Transact in Memory)’을 세웠다. 안식년을 이용해 실리콘밸리에 진출해 2005년 독일 소프트웨어기업 SAP에 회사를 매각했다. SAP의 최신 주력 서비스인 ‘HANA(하나) 플랫폼’은 그의 기술을 토대로 개발돼 글로벌 기업들의 실시간(實時間) 경영에 활용되고 있다.

서울대 전기공학과 졸업 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보기 드물게 글로벌 무대에서 창업과 비즈니스 경험을 한 ‘교수-기업인’이다. 서울대에 지금까지 12억여원을 기부(寄附)했다. 차 원장과의 인터뷰는 서울대 후문 가까이 있는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에서 샌드위치 점심을 겸해 2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2020년 3월 문을 연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 내부. 서울대 관악캠퍼스내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내부 벽을 모두 없앴고 120도(度) 책상을 사용한다. 2022년부터 석사과정 80명, 박사과정 30명으로 연간 입학정원이 늘었다./송의달 기자

- 대기업도 많은데, 왜 대학이 ‘혁신 허브’가 돼야 하나?

“디지털 대전환, 글로벌 팬데믹, 미·중(美中) 패권 경쟁, 기후변화가 몰려오는 세계사적 변곡점에서 우리가 믿을 것은 혁신 인재 뿐이다. 대기업의 연구개발(R&D)은 속성상 단기 실적과 상품 개발·향상에 치중한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최고의 인재와 교수들이 있는 대학은 ‘세상을 바꾸는 기술’(transformational technology)을 내기에 가장 좋고 효율적이다. 대학이 글로벌 혁신과 창업의 요람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학이 글로벌 혁신과 창업의 요람”

- 선진국에선 대학이 ‘혁신 허브’ 역할을 하나?

“그렇다. 교수와 대학원생, 연구원들이 실험실 벤처로 출발해 기업가치(시가총액) 1조원짜리 스타트업(유니콘)과 10조원짜리 스타트업(데카콘), 100조원짜리 기업(헥토콘)으로 진화하는 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 스타트업이 수천 명의 종업원을 둔 조(兆) 단위 기업이 되면, 국부(國富)와 일자리 창출에 숨통이 확 트인다.”

차 원장은 미국 대학 얘기를 꺼냈다.

“UC버클리 캠퍼스 교수들과 대학원생 등 7명이 2013년 창업한 데이터브릭스(databricks)는 지난해 45조원 가치를 인정받고 100조원대 기업으로 크고 있다. 하버드대 의대 교수의 바이오 연구 기술로 2010년 세운 모더나(Moderna)는 작년 10월 시가총액 1230억달러(약147조원)를 찍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 있는 바이오 테크놀로지 기업인 모더나 본사. 창업 11년 만에 시가총액 100조원짜리 기업으로 발돋움했다./조선일보DB

- 현재 기업가치 100조원이 넘는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 LG에너지솔류션 등 뿐인데.

“가능성을 의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나? 우리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확고한 비전과 목표로 전략적 노력을 기울이는 게 중요하다. 나는 ‘HANA 플랫폼’으로 50조원이던 독일SAP 기업가치를 200조원으로 높여 봤다.”

그는 이어 말했다.

“데이터브릭스의 창업자 7명은 시작할 때부터 나와 교류하며 잘 알고 있다. 이 회사는 지금 3000여명 규모이다. 100조원짜리 기업은 꿈이 아니다. 똑똑한 몇 사람과 시스템만 뒷받침되면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데이터 분석과 인공지능(AI) 전문기업인 데이터브릭스 종업원들 모습. 5000개가 넘는 기업 고객을 갖고 있다./Linkedin 제공

◇“100조 기업 10개...목표와 인재 있으면 가능”

그는 “올 1월 우리나라 상위 100대 기업 시가총액 합계가 2100조원인데, 100조짜리 기업 10개를 중심으로 전후방(前後方) 산업 및 생태계로 1000조원이 넘는 새로운 가치가 추가되면 대한민국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세계적으로 유니콘 기업은 1000여곳이고, 유니콘의 10배인 데카콘은 40여곳 있다. 미국에서 창업한 곳을 포함해 한국인이 세운 유니콘 스타트업은 이달 현재 18개이나 데카콘은 아직까지 전무(全無)하다.

차 원장은 “코로나 팬데믹 발발후 최근 2년 동안 전 세계에 그전 보다 두 배 많은 돈이 풀렸다. 이 돈은 여러 기업들에 똑같이 투자되지 않고 확실한 기업에 10배 이상 많이 간다. 혁신 기술을 갖고 제대로 키우는 게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구글 산하 유튜브의 머신러닝 엔지니어 출신인 안익진 대표가 2013년 미국에서 세운 데이터 전문기업 몰로코(Moloco)는 지난해 15억달러 가치를 인정받아 데카콘은 확실하고 100조 규모로도 노려볼 만하다.”

안익진 몰로코 창업자 겸 대표이사/몰로코 제공

◇“한국의 대학투자 OECD 최하위 수준”

- 목표는 좋은데 정작 우리나라 대학 상황은 어떤가?

“우리나라 대학생 1명당 정부 재정 지원이 유아(乳兒) 지원 보다 적은 게 현실이다. 2022년도 교육부 예산을 보면 대학에 지원되는 고등교육 예산(11조9009억원)은 유아·초중등 예산(70조7300억원)의 6분의 1 수준이다. 대학 교육의 중요성 등을 감안하면 턱없이 빈약하다.”

차 원장은 “인구 8400만명의 독일 연방정부의 대학 지원 예산은 40조원 이상 규모로 인구 5000만명인 우리나라의 세 배”라며 “지난해 한국의 고등교육 투자는 대학생 1인당 1만1290달러로 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이런 여건에서 한국 대학들이 혁신 허브로 세계를 선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어떤 돌파구가 있을까?

“대학에 대한 통제·간섭이라는 족쇄를 풀어야 한다. 그리고 대학의 재정 자립과 자율적인 지배 구조를 보장하는 발상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일례로 한국 대학들은 국내외 기부금을 받아도 자율적으로 운용 못하고 정부 규정에 맞춰야 한다. 하버드·스탠퍼드·MIT 등은 기금 최고운용책임자를 통한 전문적인 투자로 연평균 운용 수익률이 15%에 달한다. 우리 대학들은 정기예금 금리 수준이지만…”

◇“대학의 재정 자립과 자율성 보장해 줘야”

차 원장의 말이다.

“1999년부터 민간 기부금에 비례한 매칭(matching) 지원을 대학에 제공하는 싱가포르 정부는 2010년부터 매칭 비율을 싱가포르국립대학(NUS)과 난양공대 등에 1.5배, 신생 대학에는 3배로 높였다. 10억 기부금이면 정부가 30억을 주는 식이다. 우리도 대학의 재정 독립·확충을 겨냥한 과감한 정책 전환이 시급하다.”

- 서울대학교의 예산·재정은 어떤가?

“정부 출연금, 등록금, 꼬리표가 붙은 연구비 등을 포함해 연간 총 1조6000억원 정도다. 서울대와 교수 숫자(2200명)가 비슷한 스탠퍼드대학의 올해(2021년 9월~2022년 8월) 예산은 74억3300만달러(약9조원)이다. 서울대학이 세계적 대학 위상을 유지하려면 지금 6000억원 정도인 발전기금을 10조원으로 늘려야 한다.”

- 대학에 왜 이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가?

“교수와 학생들이 실패 두려움 없이 마음껏 혁신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파괴적 혁신을 이루려면 실패 경험 축적이 필요하다. 구글, 아마존 같은 테크 기업이나 명문 연구소 연구원을 학교로 데려 오려면 기본급 외에 다양한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대학의 탄탄한 재정과 자율성은 혁신 허브가 되는데 필수불가결하다.”

2000년 제10대 스탠퍼드대 총장에 취임한 존 헤네시(John Hennessy). 대학 실험실 연구를 토대로 벤처 기업을 창업해 성공시킨 컴퓨터과학자이다. 현재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 이사회 의장과 나이트-헤네시 재단 대표를 맡고 있다./조선일보DB
존 헤네시 스탠퍼드대 총장이 퇴임후 2018년에 낸 저서. 16년간 총장 재임 경험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 철학을 담고 있다. 국내에선 <어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라는 제목으로 2019년 번역출간됐다./송의달 기자

차 원장은 “그런 점에서 높은 재정 자립도와 독립된 지배 구조로 세계 변화를 앞장서 이끄는 미국 대학들은 매우 모범적이다”고 했다.

“2000년 스탠퍼드대 총장에 취임한 존 헤네시 박사는 62억달러이던 기부금을 16년 재임기간 동안 224억달러로 불렸다. 작년 한 해 이 대학 기부금은 121억달러 순증(純增)했다. 스탠퍼드대는 3억달러를 들여 캠퍼스 중앙에 데이터사이언스 빌딩을 짓고 있다.”

스탠퍼드대가 캠퍼스 중앙에 3억달러를 투자해 짓고 있는 데이터사이언스 교육연구 컴플렉스/스탠퍼드대 제공

◇“美 대학들, 돈과 자율성으로 글로벌 혁신 선도”

그는 “UC버클리도 2020년 마이크로소프트 캠브리지연구소 설립자인 제니퍼 체이스 박사를 신설한 ‘컴퓨팅, 데이터사이언스와 사회(CDSS)’ 부총장(Vice Provost)으로 영입해 매년 6000여명이 CDSS 강의를 듣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 선진국 대학에선 어떻게 기부가 이처럼 활발한가?

“다양한 세제(稅制) 혜택과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문화, 기부자를 지극정성으로 예우(禮遇)하는 대학 등이 어우러져서다. UC버클리에 2억5200만달러를 기부한 시민은 이름 비공개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데이터브릭스 창업자 중 3명은 각 2500만달러(약 300억원)씩 모교에 기부했다. 학내 창업으로 번 돈을 다시 기부하는 선순환 구조이다.”

- 우리나라 1위인 서울대부터 변해야 하지 않나?

“공감한다. 서울대가 바뀌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달라질 수 없다. 학내에서 위기의식을 토로하는 사람은 많지만 변화의 추진 동력이 없고, 훌륭한 인재들의 잠재력이 사장(死藏)되고 있다. 특히 서울대 법인화 이후 학교 위상이 내려가고 내부 시스템은 더 경직되고 있다. 안락 지대(comfort zone)에 빠져 절박함과 절실함이 안 보인다. 서울대 총장은 대통령과 수시로 독대(獨對)해 나라의 미래를 설계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가운데 있는 중앙도서관과 관정도서관 모습/서울대 제공

◇“안락함 빠진 서울대...법인화 이후 위상 더 내려가”

- 서울대는 앞으로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학내에 건강한 도전과 혁신 기풍이 넘쳐나야 한다. 그러려면 교수 인재 순환이 활발해져야 한다. 젊은 조교수 비율을 대폭 높이고, 글로벌 기업 연구자들을 겸직교수 등으로 많이 유치해야 한다. 실리콘밸리와 유럽에 글로벌 캠퍼스를 세워 글로벌 포지셔닝도 높여야 한다.”

- 기업과 대학이 연계한 산학(産學) 협동은 어떤가?

“교수가 첨단 기술을 기업에 전수하는 산업화 시대 방식은 끝났다. 이제는 교수가 자신의 연구물로 창업해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1~2년 회사를 셋업한 뒤 복귀해 새 연구를 하다가 다시 창업하는 연속 기업가(serial entrepreneur) 모델이 자리잡아야 한다. 이런 경험을 한 교수들은 중요도에 대한 판단이 빠르고 강의와 연구의 깊이가 확실히 다르다.”

2022년 2월 21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고 있는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장/송의달 기자

- 올 5월 취임하는 새 대통령과 정부에 당부한다면?

“정부의 획일적인 통제와 파편화된 재정 지원으로 대학이 계속 고사(枯死)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깜깜하다. 대학이 혁신 허브가 돼 신산업과 새 일자리를 창출하게끔 자유와 자율을 허락하고 재정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차 원장은 “시간이 별로 없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우리나라 국운(國運)의 마지막 창문(last window)이 닫혀버릴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