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부산 강서구 지사과학단지에 있는 원자력발전 부품 업체 D사. 이 회사 사장은 전날 통화에서 “직원들 다 정리하고, 사업에서 손 뗐다. 더 할 말도 없고, 여기 내려와 봐야 볼 것도 없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건물 외벽엔 큼지막하게 D사 간판이 붙어 있지만 정작 사무실 입구에는 ‘수출포장목재건조기’ ‘화목보일러’ ‘목공기계’ 등 원전(原電)과 상관없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D사는 2000년대 초부터 두산중공업에 주 기기 부품을 납품할 정도로 원전 부품 분야에서 강소 기업으로 꼽혔지만 이젠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2021년 12월13일 오후 경북 울진군 북면 한 건설현장의 모습.신한울 3~4호기 건설 중단 여파로 건설이 중단된 채 방치되어 있다/김동환 기자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에 있는 원전 부품 업체 S사는 탈원전 전인 2016년만 해도 전체 매출의 80%를 원전이 차지했다. 하지만 이날 찾은 800평 규모 공장 안에 원전 부품은 하나도 없었다. S사가 생산 시설을 늘리려 분양받은 2공장 터엔 잡초만 무성했다. S사 이사는 “올 초 신고리 6호기에 납품한 뒤로 원전 매출은 영(0)”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원전 전문 업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이제는 명함에서도 원전을 뺐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산업 생태계를 구성해왔던 중소 부품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자랑하던 한국 원전은 붕괴 직전에 놓였다. 국내 최대 원전 기업인 두산중공업의 원전 관련 신규 계약은 2016년 2786건에 달했지만, 2020년에는 1172건으로 절반에 못 미쳤다. 두산과 납품 계약을 맺은 협력업체도 320곳에서 227곳으로 급감했다. 원전 공기업의 한 임원은 “5년짜리 정권이 60년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렸다”며 “정권이 바뀌고 원전 시동을 다시 건다 해도 산업 생태계를 되살리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는 “남아있는 기술 인력과 인프라를 유지하려면 신한울 3, 4호기부터 공사를 재개하는 게 시급하다”며 “최소한 국내 원자력 기술 기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책 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5년째 방치된 울진 신한울 3·4호기 부지 - 지난달 13일 오후 경북 울진군 북면 한울원자력본부 내 신한울 3~4호기 건설 부지에는 원자로가 들어설 자리를 표시한 시멘트 기둥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신한울 3~4호기는 이미 7000억원이 투입됐지만 탈원전 정책으로 5년째 방치돼 있다. 원전 산업에 의지해온 울진 지역 경제는 침체 늪에 빠졌다. 사진 멀리 보이는 원전은 올해 준공을 앞둔 신한울 1~2호기다. /울진=김동환 기자

박현철씨는 창원에서 원전 부품사 두 곳을 운영했다. 원전 셸(shell·원자로 내부 구조물) 가공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인정받아 두산중공업뿐 아니라 일본 도시바나 GE에도 납품했다. 박씨는 2016년 600억원을 투자해 2만평 규모의 가포 공장을 세웠지만 탈원전 이후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2018년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 그는 결국 이 공장을 조선 기자재 업체에 매각했다. 인근에 있는 봉암 공장도 2020년부터 1년 동안 기업 회생 절차를 거쳐 반도체 장비 업체에 매각했다. 그사이 직원 350여 명은 뿔뿔이 흩어졌고, 박씨는 신용 불량자가 됐다.

원전 부품을 만드는 K사는 2017년 매출이 반 토막 나더니 2018년부터 4년 내리 적자를 봤다. K사 대표는 “일 다 끊기고 결딴났어”라고 했다. 창원의 부동산 업자는 “대출 이자도 못 갚는 기업이 많아 경매로 넘어간 업체가 수도 없이 많았다”며 “원전 중소 업체는 거의 전멸”이라고 말했다.

“허공에 메아리죠. 정부고 뭐고 다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뭘 한다고 죽은 회사가 살아나나요.”

창원의 원전 부품사 C 대표는 “원전의 ‘원’ 자도 꺼내지 말라는 게 이곳 분위기”라며 이렇게 말했다. 창원 지역 업계 관계자는 “탈원전 정책에 항의해봤자 정권 내내 달라지는 건 없고, 오히려 (언론에) 실명으로 나간 기업이 세무조사 받았다는 소문이 돌고, 회사 힘들다는 얘기에 은행이 득달같이 달려와 대출을 회수하려 해 아예 입을 닫았다”고 했다.

탈원전 정책 이후 국내 원전 시장은 쪼그라들었다. 한국원자력산업협회가 지난해 4월 내놓은 원자력 산업 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원전 산업 매출은 2010년 16조7580억원에서 2016년 27조4513억원까지 증가했다. 2017년 처음으로 감소하더니 2019년 20조7317억원으로 3년 만에 7조원 가까이 줄어 1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또 두산중공업 등 원전 공급 업체의 2019년 매출은 3조9311억원으로 2016년(5조5034억원)보다 30% 가까이 급감했다. 한 원전 업계 관계자는 “2020년과 2021년은 발주가 마르면서 2012년 이후 이어져오던 20조원대 매출도 무너졌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는 원전 산업 생태계 유지를 위해 수출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특정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자금을 동원하는 능력에서 뒤지는 한국 기업이 러시아·중국을 제치기도 쉽지 않은 데다 수출에 성공한다고 해도 원전 생태계를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