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미국 애플은 당시엔 한국 소비자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아이폰3GS를 처음 선보였다. 이후 11년 동안 애플은 한국에서 아이폰의 브랜드 광고에 최대 1500억원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 돈은 애플의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았다. TV의 아이폰 광고를 보면 잔뜩 제품 선전을 한 뒤 마지막 장면에는 SK텔레콤·KT·LG유플러스와 같은 통신사 이름이 등장한다. 애플이 한국 통신사들에 전가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갑(甲) 중의 갑으로 통하는 통신사들도 애플한테는 을(乙)이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는 2016년부터 광고비 전가를 포함, 무상수리 비용 전가, 불합리한 계약 조항 등 불공정거래를 조사했지만, 애플은 모르쇠로 일관하다 작년에야 자진 시정안을 두 차례 냈다. 공정위가 구체성 미흡으로 반려하자, 올 6월에 아이폰 유상 수리비 할인, 연구개발 센터 설립 등의 시정안을 다시 제출했다. 하지만 끝내 광고비에 대해선 ‘앞으론 광고비를 상호 협의하는 형태로 개선하겠다’며 선을 그었다. 국내 통신 대기업의 관계자는 “애플의 자진 시정안은 대규모 과징금을 피하고 법적 강제력이 있는 시정명령을 피하려는 꼼수인데 공정위도 더는 끌기 싫어 동의 의결을 받아주는 분위기”라며 “삼성전자가 애플처럼 했다면 공정위가 검찰 고발까지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시장의 독과점 파워와 최고의 브랜드를 앞세운 외국 기업 앞에서는 한국 대기업들도 ‘갑질’을 당하지만, 국내 규제기관은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글이 운영하는 유튜브는 한국에 이용자가 수천만 명이 있지만, 정작 통신사에는 통신망 이용료를 거의 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버 등이 수백억원대 망 이용료를 부담하는 것과 딴판이다. 불공정 거래로 보이지만 공정위가 따로 이 문제를 조사해 과징금이나 시정명령을 내린 적은 없다.

샤넬이나 루이비통 같은 명품 앞에서 국내 백화점도 쩔쩔맨다. 한국 소비자가 선호하는 유럽의 명품 브랜드 기업들은 가장 좋은 위치에 입점하면서도 백화점에는 국내 브랜드보다 적은 판매 수수료를 낸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샤넬·루이비통이 없는 백화점을 한국 소비자가 백화점으로 보겠느냐”며 “명품의 요구가 과도해도 백화점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백화점들은 공정위에 이 문제를 제기할 생각은 꿈도 못 꾼다. 공정위는 “백화점이 과도하게 명품 기업에 낮은 수수료를 받고, 인테리어 비용을 대신 내주고, 계약 기간도 장기간으로 하는 혜택을 줬다”며 국내 백화점을 규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들이 왜 그런 불리한 계약을 했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명품업체에만 혜택을 주고 국산 브랜드를 차별한 것만 문제라는 지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