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지난 21일 오후, 일본 최대 차량용 반도체 회사 르네사스(Renesas)의 경영진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 19일 차량용 반도체(MCU)를 만드는 이바라키(茨城)현 나카(那珂) 공장에서 큰불이 나 생산이 중단된 데 따른 것이었다. MCU(Micro Control Unit)는 자동차의 각 기능을 제어하는 반도체로, 대당 평균 200개가 들어간다. 이 중 한두개라도 빠지면 자동차를 완성할 수가 없다.

업체별 MCU 세계시장 점유율

회견에서 시바타 히데토시(柴田英利) 최고경영자(CEO)는 “생산 재개에 1개월 걸린다”고 했으나, 22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완전 복구엔 3개월 정도 소요될 것”이라고 전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10년 전의 ‘르네사스 사태’보다 피해가 더 클 것으로 보고 있다. 르네사스 사태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나카 공장이 멈추면서, 세계 자동차 회사 생산에 큰 차질이 빚어졌던 것을 말한다.

이번 사태의 심각성은 22일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이 기자회견에서 “르네사스 피해 복구에 경제산업성이 나설 것”이라고 말한 데서도 드러난다. 이날 도요타·혼다 등의 주가가 일제히 폭락했다. 지난 주말 미·일 당국이 금융 완화 정책을 재검토한다고 한 것과 겹치며, 닛케이평균 종가도 전 주말보다 617엔(2.1%) 하락한 2만9174엔을 기록했다.

◇글로벌 자동차반도체 3강의 동시 생산중단 ‘초유 사태’

글로벌 MCU 시장 2위인 르네사스의 이번 화재로, 관련 반도체 글로벌 3강(强)의 생산이 한꺼번에 차질을 빚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됐다. 1·3위인 네덜란드 NXP, 독일 인피니언은 이미 지난 2월 텍사스 한파에 따른 대규모 정전으로, 텍사스에 있는 MCU 주력 공장의 가동이 중단됐다. 업계에 따르면, 이들 회사의 생산이 완전히 복구되는 것은 6월 이후로 예상된다. NXP·인피니언은 유럽, 르네사스는 일본 자동차 회사 납품이 많지만, MCU 공급망은 자동차 회사의 국적을 불문하고 전 세계에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조만간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의 연쇄 생산 중단도 우려된다.

르네사스 화재는 자동차 업계의 반도체 공급난이 이미 심각한 상태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여파가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사태 이후 비대면·온라인 경제의 활성화로 IT 쪽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면서 IT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은 자동차용 반도체의 공급은 충분치 않은 상태다. 현대자동차는 22일 “아직 직접적인 생산 차질이 확인된 것은 없으나, 이미 차량 반도체 수급이 전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라, 르네사스 화재 이후의 영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르네사스는 지난가을부터 대만 TSMC 등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업체)에 위탁했던 물량까지 자체 공장으로 돌리는 바람에 피해가 더 커졌다. 파운드리 생산 부족에 대비하고 미·중 반도체 전쟁에서 공급망을 안정화하기 위해, 생산 내재화 비율을 높인 것이 오히려 화를 키운 것이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르네사스는 원래부터 타사보다 자체 생산 비율이 높았다”며 “이번 화재로 본 피해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핵심부품이 기계에서 반도체로...수급문제 장기화 상시화 가능성

이번 사태는 자동차 산업의 핵심 부품이 기계에서 반도체로 옮아가면서, 자동차 회사 수급 문제가 장기화되는 일이 일상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부품이 기계 중심일 때는 해당 부품 공장이 재해로 가동 중단돼도 빠른 복구가 가능했지만, 반도체는 특성상 생산라인이 멈추면 완전 복구까지 기본 3개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일본은 2007년에도 피스톤링(실린더를 밀봉해주는 부품) 일본 시장 점유율 50%인 부품 업체 리켄의 공장이 니가타(新潟) 지진으로 중단되면서, 일본 내 모든 자동차 회사 공장이 멈추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지만, 자동차 회사 기술자들까지 총동원돼 몇 주 만에 가동이 정상화된 적이 있다.

반도체 생산 중단에 따른 자동차 회사 피해는 앞으로 점점 커질 전망이다. 현재는 자동차 한 대당 반도체가 300개 정도 들어가지만, 전기·자율주행차 시대로 가면 2000개 이상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국내 자동차 회사의 반도체 공급망 관리가 앞으로 훨씬 더 중요해진다”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가 최근 발생한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의 틈을 잘 파고들어 사업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