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2022년 5월 12일 서울 신림동 동서리치빌딩에서 은사인 조순 전 경제부총리와의 55년 인연을 정리한 책 ‘나의 스승, 나의 인생’을 펴낸 것과 관련해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정운찬(76) 전 국무총리가 경제부총리와 서울시장을 지낸 은사 조순(94)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55년 인연을 술회한 책 ‘나의 스승, 나의 인생’(나남출판)을 펴냈다.

12일 만난 정 전 총리는 “조순 선생은 하늘 같은 존재이고, 참된 스승을 만난 건 인생의 큰 행운”이라고 했다. 책에는 취직, 결혼, 유학을 할 때 스승 조순의 도움을 받은 갖가지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그는 ‘총(總)’이라는 글자가 붙은 3가지 직책(서울대 총장·국무총리·한국야구위원회 총재)을 맡을 때마다 스승의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정 전 총리는 “1학년 경제원론 과목에서 F학점을 받아 공부에 흥미를 잃었는데 2학년 때 부임한 조순 교수의 경제학 강독 수업을 듣고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면 칠판이 경제학은 물론이고 철학, 역사, 한시까지 영어와 독일어 등으로 현란하게 채워졌어요. 가장 지적인 예술 작품이었죠.”

대학 졸업 후 한국은행에 취직한 그에게 미국 유학을 권유한 것도 스승 조순이었다. 석사(마이애미대)와 박사(프린스턴대) 학위를 할 대학도 정해줬다. 컬럼비아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 그를 서울대로 불러준 사람도 스승이었다.

1990년대초 경제학 원론 개정 작업 당시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가운데)와 정운찬 전 국무총리. 오른쪽은 전성인 홍익대 교수/나남출판

그는 “선생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제 처와 결혼도 못 할 뻔했다”며 웃었다. 그는 어려운 형편 탓에 처가의 결혼 승낙을 받지 못한 채 혼자 유학을 떠났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조순 선생이 정 전 총리의 장인·장모를 만나 “정군이 작은 대학의 교수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결혼 허락을 요청했다. 그제야 승낙이 떨어져 부인이 미국에 건너와 프린스턴대 교내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정 전 총리는 유학 당시 스승 조순으로부터 받은 자필 편지·엽서들을 4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보관 중이다.

1989년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가운데)와 등산을 간 정운찬 전 국무총리. 오른쪽은 고인이 된 곽승영 미국 하워드대 교수./나남출판

정 전 총리는 1986년 서울대 교수 시국선언문과 2002년 서울대 총장 취임사를 쓸 때 조순 선생의 조언을 받아 고쳤다고 했다. 그는 “2009년 총리직 제의를 받고 고민할 때 조순 선생님께 물어봤더니 흔쾌히 해보라 하셔서 수락했다”며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도 선생님과 상의했다”고 했다.

정 전 총리는 작년부터 조순 선생을 2주에 한 번쯤 봉천동 자택으로 찾아가 말동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스승의 날을 앞두고 지난 11일에도 뵙고 왔다”고 했다.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