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한 장면./신씨네

“그녀와 저는 같은 문으로 함깨 지하철을 타게 되씀미다. 취해서 비틀거리지만 안는다면 정말 매력저기고 갠차는 아가씨여쪄··· 푸하하핫~~!”

‘귀여니’ 전에 이 소설이 있었다. 1999년 5월부터 PC통신 ID ‘견우74’가 PC통신 나우누리 유머난에 연재한 자전적 코미디 소설 ‘지하철의 엽기적인 그녀’다. ‘퇴마록’이나 ‘드래곤 라자’와 함께 묶기엔 조심스럽지만, 영향력이나 화제성에선 결코 밀리지 않는 PC통신 문학 최고의 히트작이었다. 2000년 종이책으로 출판됐고, 다음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한 장면. 아이스크림 전문점을 찾은 '그녀'와 견우./신씨네

20년 전인 2001년 7월 개봉한 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돼 국내 영화 순위 5위에 올랐다. 왓챠에서도 ‘최근 한 달 간 시청률 상위 5% 작품’에 올라 있다. 전지현 주연의 ‘킹덤 : 아신전’ 공개 후 넷플릭스가 발 빠르게 움직인 듯하다. ‘원조 국민 첫사랑’으로 전 국민적 신드롬을 일으켰던 전지현의 매력과 2000년대 초반 아련한 PC통신 감성에 흠뻑 젖을 기회다.

영화는 당시 최종 관객 수 약 488만명을 모으며 영화 ‘친구’, ‘조폭마누라’에 이어 2001년 흥행 순위 3위에 올랐다. 국내뿐 아니라 일본·중국·대만·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전역에 수출됐고, 중화권에서 특히 인기를 끌면서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역사를 새로 썼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신씨네

포스터와 홍보 문구부터 그 시절 감성을 물씬 풍긴다. ‘절라 유쾌 사랑이야기’ ‘온몸이 뽀사지도록 즐거워진다!’ ‘이 여자, 혹시 꽃뱀 아닐까여?’··· 2020년의 감수성으론 당장 철퇴를 맞을 법한 문구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언론엔 ‘기행적인 여학생과 순진한 복학생의 좌출우동 얘기’로 소개됐다.

왓챠·넷플릭스로 이 영화를 처음 본 요즘 세대들 사이에선 “유치하고 개연성이 떨어진다” “지금 저러면 범죄다”란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사실 488만 관객을 동원했던 당시에도 평론가 사이에선 평이 갈렸다. 언론엔 ‘인터넷 세대를 위한 기획 상품’ ‘코미디·멜로·엽기 코드가 버무려진 팬시 상품’이라는 다소 폄하적 의도가 담긴 수식어들이 등장했고, “요즘 한국 영화들에서 종종 드러나는 퇴행의 그림자가 이 영화에도 짙게 깔려있다”는 표현도 나왔다.

그러나 유치하고 퇴행적인 이 영화가 당시 한국 영화의 판도를 바꿔 놓았단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할리우드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제작비 1억 달러 짜리 대작 ‘A.I.’와 맞붙은 일화는 유명하다. 차태현은 개봉 전 본지와 인터뷰에서 “첫 주연 영화인데 왜 내 데뷔작이 희생양이 돼야 하나···. 여름 대작 시즌이라 부담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개봉 6일 만에 서울 관객 34만 4000명, 전국 관객 100만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고 개봉 3주 만에 ‘A.I.’ 관객 수를 가뿐히 눌렀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한 장면./신씨네

‘엽기적인 그녀’ 신드롬은 8할이 전지현 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하철 4호선 상계역에서 흰 바지를 입고 춘 도발적인 테크노 댄스로 ‘전지현 열풍’을 일으켰던 그는 모 광고 전문 인터넷 업체의 ‘카리스마가 짱인 CF 모델’ 조사에서 43.5%의 답변을 받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선 이름 없이 ‘그녀’로 등장한다. 지하철에서 술에 ‘만땅’ 취해 어르신 대머리에 토하는가 하면 남자 주인공 견우의 안면과 뒤통수를 무자비하게 가격하는 과격한 캐릭터다. “술이 절라 쎈 여잔가 봅니다. 그녀는 정말 깡다구 죽입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녀는 술집에서 원조교제가 의심되는 옆테이블을 찾아가 깽판을 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과격한 행동은 사실 내면의 상처를 가리기 위한 일종의 가면. 옛 사랑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원래 그러치안은데 실연의 아픔이 너무나 큰 것 가씀미다. 괜히 불쌍한 마음이 듬미다. 제 마음 어디에선가 싸늘한 바람이 부는 것도 가씀미다. 그래, 이 여자의 아픔을 한번 치료해보자!!” 견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과격하고 강렬한 매력에 빠져든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교복데이트 장면./신씨네

영화는 당시 연인들의 실제 데이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00일 기념일에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강의실에 들이닥치거나 하이힐과 운동화를 바꿔 신는 데이트, ‘고삐리’ 교복을 입고 술집·클럽에 가는 장면들이 특히 화제가 됐다. 그때 대학가엔 신발을 바꿔 신고 걷는 커플들이 종종 등장했고, 교복 입고 술집 데이트를 하는 젊은이들이 늘었다고 한다.

“여자다운 거 요구하지 마세요. 술은 절대 세 잔 이상 먹이면 안 되구요. 가끔 때리면 아파도 안 아픈 척 하거나 안 아파도 아픈 척하는 거 좋아해요”··· 견우가 다른 남자에게 그녀를 부탁하며 남긴 ‘십계명’은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된다. 산봉우리에 오른 ‘그녀’가 오열하며 “견우야!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는 여잔가봐!”라고 외치는 장면은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다.

영화 '엽기적인그녀'의 한 장면./신씨네

전에 없던 여성 캐릭터의 탄생이기도 했다. 극 중 1979년생인 그녀(전지현)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여자친구상’을 새로 썼다. 지고지순하고 청순하고 수줍은 여성은 가라! 2002년 신문엔 “’너 내 말 안 들으면 주우거!’하며 남자친구 앞에서 주먹을 쳐드는 그녀가 젊은이들의 폭발적 호응을 받은 배경에는 ‘남녀 간 성 역할 뒤집기’가 주는 통쾌함이 있다”는 글도 실렸다.

반면 “오히려 ‘예쁘면 다 용서된다’는 진부한 명제에 입맛을 맞췄다” “이 모든 기행이 결국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슬픔 때문이었다니.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결국 전통적인 한국 영화의 여성 캐릭터로 돌아가 버렸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그녀'가 "견우야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는 여잔가봐!"를 외치는 장면. 많은 패러디를 낳았다./신씨네

‘먹고대학생(직업 없이 노는 사람)’ ‘복딩이(복학생)’등 요즘 세대에게 낯선 그 시절 유행어들을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제목에 들어간 ‘엽기’란 단어도 사실 2000년대 초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유행어다. 2001년 인터넷 검색엔진 ‘엠파스’에서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로 꼽히기도 했다. 사전적 의미는 ‘비정상적이고 괴이한 일에 흥미를 느끼는 현상’이지만, 당시 네티즌들은 ‘신선하다’ ‘웃기다’ 등의 뜻으로도 사용했다.

“우연이란 노력한 사람에게 운명이 놓아주는 다리랍니다” 요즘 세상에 ‘운명적 사랑’을 말하는 건 촌스럽지만, 영화로 보면 여전히 아련한 주제다. 영화에 등장하는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처럼, 한국인의 멜로 정서를 기가 막히게 건드린 2000년대 명작이다. 넷플릭스·왓챠·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한 장면. 연세대학교 캠퍼스에서 커플이 하이힐과 운동화를 서로 바꿔신고 데이트하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신씨네

개요 영화 l 한국 l 2001년 l 137분

등급 15세 관람가

특징 “해맑게 웃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제 마음도 한 없이 행복해짐미다.”

평점 로튼토마토 관객평가🍅93%, IMDb⭐8.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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