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을 읽고 있는 월운 스님. 월운 스님 사진은 이렇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모습이 많다. /월운스님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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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5일자 조선일보에 월운 스님의 일기를 모은 책 ‘못다 갚을 은혜’를 소개했습니다. 월운 스님은 스승 운허 스님의 뒤를 이어 한글 대장경을 완간한 분입니다. 또한 남양주 봉선사를 재건한 분이기도 합니다. 스님은 평생 일기를 썼는데, 2010~2014년 그 일기를 손수 다시 정리했답니다. 그 일기를 연세대 철학과 신규탁 교수에게 맡기며 사후 출간을 당부했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도 몰랐던 1950~70년대 불교 풍경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지면의 제약 때문에 흥미롭고 의미있는 내용을 소상히 소개하지 못해서 ‘오마이갓’을 통해서 좀더 말씀드릴까 합니다.

#일면식 없이 편지로만 맺어진 사제(師弟) 관계

월운 스님은 출가 전에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습니다. ‘먹고 살 방도’를 찾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경남 남해 화방사에서 출가하게 되지요. 남해 화방사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지만 월운 스님의 ‘출가 본사(本寺)는 남양주 봉선사, 은사는 운허 스님’으로 결정됐지요.

사연은 이렇습니다. 출가자에겐 은사가 중요합니다. 세속의 부모와 마찬가지이지요. 월운 스님이 한문을 잘 하는 것을 본 주변의 스님들이 당대의 대강백(大講伯)인 운허 스님에게 편지를 보냈답니다. “한문을 잘 하는 출가자가 있는데 운허 스님의 제자로 삼으면 어떻겠습니까” 이에 운허 스님은 답장으로 허락한 것이지요.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게 됐답니다.

월운 스님의 은사인 운허 스님. 운허 스님은 월운 스님에게 "경학을 익혀 부처님 은혜를 갚는 길로 가라"고 권했다.

스승과 제자가 처음 상봉한 것은 출가한 지 3년 후 부산 범어사에서 운허 스님이 ‘능엄경’을 강의할 때였습니다. 어느날 운허 스님이 월운 스님을 불러 “본사는 어디이며 은사는 누구시냐”고 물었답니다. “본사는 봉선사, 은사는 운허 스님’이란 답을 듣자 운허 스님은 하하 웃으면서 “언젠가 내게 공부할 사람을 보내겠다는 편지가 왔기에 그러라고 했는 것 같은데 네가 바로 그 당사자인가” 했답니다. 옛 전설 속에 영웅이 몰랐던 아들을 만나 “네가 내 아들이란 말이냐”라며 감격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스승은 이어서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면서 “그대는 경학(經學)을 익혀 부처님 은혜를 갚는 일을 가게”라고 당부했고, 제자는 삼배로 첫 인사를 올렸다지요. 월운 스님은 일기에서 “이것이 우리 사자간(師資間) 첫 상면이며, 1952년 7월 11일 음력 5월 22일 저녁이었다”고 적었습니다.

봉선사 일주문. 운허 스님의 유묵 중 글자를 골라 편액을 만들었다. /이신영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청량리역 시계탑 밑에서 접선(?)한 사숙(師叔)

월운 스님은 출가 후 부산·경남권의 사찰에서 살면서 경전을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하는 한편 마산대(현 경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동국대 대학원에 합격했습니다. 문제는 숙소. 은사는 서찰 한 통을 써주시며 “경기도 양주 불암사 주지가 만허(滿虛)라는 분인데 내게는 사제(師弟·절집안의 동생뻘)가 되는 분이야. 부탁해놨으니, 떠나는 날짜와 기차 시각을 미리 편지로 알리고, 청량리 역전광장 시계탑 밑으로 가서 서 있으면 만허 스님이라는 분이 너를 인도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정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이지요. 당시 지방 학생들은 자취나 하숙, 가정교사를 해서라도 서울 생활을 할 수 있지만 스님들은 그마저도 쉽지 않았죠. 월운 스님은 일기에서 “‘동불암(東佛巖)’ ‘서진관(西津寬)’ ‘남삼막(南三幕)’ ‘북승가(北僧伽)’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고 적었습니다. 불암사, 진관사, 삼막사, 승가사가 당시 서울의 4대 사찰이었으니 그 가운데 불암사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된 것은 월운 스님 입장에선 큰 다행이었지요.

우여곡절 끝에 청량리역 시계탑 밑에서 만허 스님을 만났는데, 만허 스님은 머리는 깎았지만 양복차림이었답니다. 처음엔 양복 차림이 이상하게 여겨졌는데 월운 스님도 곧 양복을 입게 됐답니다. 당시 동국대 백성욱 총장이 “대학원생은 모두 양복을 입으라”고 명했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학생이 승복을 입고 학생석에 앉았으면 교수가 어떻게 엄하게 가르칠 수 있겠느냐”는 이유였답니다.

#잊지 못할 방한화·시계 선물

봉선사는 경전 한글 번역 사찰답게 '대웅전' 대신 '큰법당'이란 한글 편액으로 유명하다. /이신영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월운 스님은 1965년엔 화성 용주사 주지 관응 스님의 부탁으로 강원(講院)을 열고 1년간 제자들에게 경전을 가르쳤지요. 이듬해인 1966년 12월 1일 강원 졸업식을 봉행했는데, 사집과(四集科) 수료생 4명은 합동으로 방한화를, 대교과(大敎科) 졸업생 4명은 합동으로 스님에게 일부시계(日附時計)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저도 ‘일부시계’의 뜻을 정확히 몰랐는데 스님은 일부시계를 ‘날짜가 뜨는 시계’라고 설명하셨네요. 아마도 자판에 날짜가 숫자로 표시되는 손목시계가 아닌가 싶네요. 스님은 “1966년 12월 1일 졸업생이 합동으로 일부시계를 선물로 주었다고 기록해놓은 것을 보면, 당시 퍽이나 흐뭇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적었습니다.

당시 절집안의 살림은 무척 어려웠습니다. 6·25 때 전소(全燒)된 봉선사를 재건할 때에도 인부들을 주변에 사는 사람들로 꾸렸답니다. 한꺼번에 건설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안 되니 돈 모일 때마다 공사를 찔끔찔끔하느라 그랬다지요. 전기를 가설할 때에도 비용 때문에 고민했답니다. 사찰 인근 군부대에서 전기를 끌어오면 150만원, 광능내에서 끌어오면 180만원이 들기 때문이었다지요. 군부대에서 끌어오면 싸지만 군부대가 이전하게 되면 재시공을 해야하는 것이 문제였지요. 그래서 결국 광능내에서 끌어왔답니다. 지금은 광릉수목원 옆 사계절이 아름다운 절 봉선사의 50년 전 풍경은 이랬답니다.

#장엄한 낙조-은사의 입적

스님들에게 경전 강의하는 월운 스님. /월운스님선양회

은사 운허 스님은 1980년 11월 7일 입적했습니다. 월운 스님은 은사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불교신문에 ‘장엄한 낙조’라는 제목의 글로 게재했습니다. 일기에도 요약해서 정리하셨는데, 감동적입니다.

운허 스님이 노환으로 몸져 누워계실 때 곁을 지키던 누군가 옆 사람과 귓속말로 “어떤 이는 기진맥진했을 때 쇠꼬리를 고아서 국물을 입에 조금 흘려 넣어드리니 소생하셨다는데,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고 했답니다. 그런데 잠든 줄 알았던 운허 스님이 버럭 역정 내시며 “기기-벙거! 허, 퍼, 벙거”라며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나무라셨답니다. 찬찬히 들어보니 “그게 어디 먹는 거냐. 죽어가는 자에게 억지로 퍼넣는 것이지…”라는 뜻이었답니다. 모욕으로 느끼셨던 모양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운허 스님에게 연명치료는 턱도 없는 일이었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지막 입적의 순간, 누워계시던 운허 스님은 누운 채 손가락으로 바닥을 건드려 시자를 불렀답니다. “뭐 드릴까요?” 등 여러 번 묻다가 “일으켜드릴까요?” 하자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앉아서 자꾸 턱을 들어 어딘가 가리키시기에 보니 장삼(長杉) 걸이쪽이었답니다. “장삼 입혀달라고요?” 하니 또 끄덕끄덕. 이어서 가사. “가사와 장삼을 다 입혀드리고 넘어지지 않게 방석으로 좌우를 고여드리니,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정(定)에 드신다. 그때 좌중이 모두 감격하고 섭섭해서 누가 선창했는지도 모르게 ‘석가모니불’ 정근을 모셨다.” 그러던 어느 순간 보니 스님은 이미 ‘좌탈(坐脫·앉아서 입적함)’ 한 상태였다. 월운 스님은 “용태가 너무나 태연하셔서 오히려 우리에게 ‘오고감이 원래 이렇거늘 웬 호들갑이냐’고 나무라시는 것만 같다”고 적었습니다.

봉선사 경내를 산책하는 월운 스님(왼쪽). /월운스님선양회

마지막까지 수행자의 엄격함을 보여준 스승 운허 스님이나 그 장엄한 광경을 정확히 일기에 기록한 제자 월운 스님. 두 분의 모습이 생생히 느껴지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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