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이정호 신부의 퇴임 예배에 필리핀, 네팔, 방글라데시 이주민들이 함께해 축하하고 있다. /이주민연대 샬롬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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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한번 보실래요?”

최근 기자와 만난 대한성공회 이정호(65) 신부님은 사진 한 장을 꺼냈습니다. 처음엔 무슨 사진인가 했습니다.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에 사람이 가득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이 신부님은 뒷줄에 손톱만하게 보이고 그 앞에는 필리핀, 네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COLUMBA FOREVER’란 손팻말을 들고 있었습니다. ‘콜룸바’는 이정호 신부의 세례명입니다.

사진은 지난 8월 14일 이 신부의 정년 퇴임 감사예배 후 촬영한 것이었습니다. 이 신부는 경기도 남양주 마석 ‘외국인 노동자의 대부’입니다.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이 지역 외국인 노동자들의 밀린 월급을 받아주고,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줬습니다. 그런 이 신부가 정년 퇴임한다고 하자 외국인 노동자 70여명이 축하 겸 응원하러 찾아온 것이지요. 이 신부님에겐 ‘사제 생활 성적표’ 같은 사진이었습니다.

이 신부가 마석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입니다. 한센인들이 양계로 생계를 잇던 성생원 주임신부로 부임한 그는 2019년 정기인사로 이곳을 떠나 인근 진접으로 옮기기까지 거의 30년 동안 마석 지역 외국인 노동자들을 챙겼습니다. 성생원은 영국 출신 성공회 사제들이 1960년대 남양주 화도읍 일대 약 4만평의 땅을 매입해 한센인들에게 나눠줘 닭을 치며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든 마을이지요. 이 신부가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한센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꽤 많이 계셨답니다. 붙임성 좋은 이 신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어울려 지내며 ‘동네 해결사’ 역할을 했답니다. 마을과 주민들에 어려움이 있으면 발벗고 나서 해결하고 어르신들 모시고 일본·미국·유럽 여행까지 했지요.

성공회 이정호 신부(가운데 모자 쓴 사람)와 방문단이 2020년 방글라데시 통기바리 지역의 학교를 방문해 환대받고 있다. 이 학교는 이 신부 등의 도움으로 전기와 수도시설을 갖췄다. /이주민연대 샬롬의 집

‘한센인 어르신들과 평생 잘 놀아(?) 보겠다’고 마음먹고 지냈지만 세월은 이곳 풍경도 바꿔놓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계장은 가구단지로 바뀌었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왔지요. 자연스럽게 이 신부가 만나고 보살피는 대상도 외국인 노동자로 바뀌었습니다. 주로 필리핀 네팔 방글라데시 출신이었답니다.

오지랖 넓기로 유명한 이 신부는 찾아오는 이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해결하기 시작했지요. 이주민연대 샬롬의 집을 중심으로 월급 떼인 사람들에겐 월급 받아주고, 다친 사람들은 치료해주고요. 필리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농구 리그도 열었습니다. 외국인복지센터도 열었습니다. 이슬람 등 다른 종교를 가진 이가 많았지요. 그러나 이 신부는 ‘본업’인 “예수 믿으라”는 말은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외국인들을 자신들을 위한 이 신부의 열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의 퇴임 감사 예배에 자발적으로 달려온 것이지요.

마석으로 찾아온 외국인들을 돌보던 이 신부가 방글라데시까지 나가게 된 것은 ‘애프터 서비스’ 차원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때가 되면 귀국합니다. 대부분 귀국 후엔 연락이 끊기지요. 그런데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한국을 그리워하며 자신들끼리 현지에서 ‘한국-방글라데시 우호 협회(KBFS)’를 결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답니다. 한국에서 험한 일을 하며 설움도 많이 당했을텐데 여전히 그들이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 신부는 2015년 현지를 방문했다가 칙사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슬람 국가임에도 거리 곳곳에 이 신부의 얼굴 사진을 넣은 한글 현수막까지 걸려 있었다고 하지요. 귀국한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방과 후 학교를 만들어 서로를 돕고 있었답니다. 방과 후 학교의 교훈(校訓)은 ‘아낌 없이 주는 나무가 되자’였다지요.

2016년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성공회 이정호 신부가 재활용 분리수거함을 전달하고 있다. 이 신부가 지난 6월 방문했을 때에도 이 수거함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정호 신부

귀국한 방글라데시 노동자들 가운데는 부자가 된 사람도 있고,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렇지만 한국을 잊지 않고 서로 상부상조하려는 모습에 이 신부는 인연을 이어가기로 마음 먹었답니다. 이 신부는 이듬해인 2016년부터 2020년초까지 4차례 청소년과 성인 후원자들과 함께 방글라데시를 찾아 생필품 등을 전하는 캠프를 진행했습니다. 이 신부가 기업과 후원자들을 찾아다니며 기증받은 물품들이었지요. 이 신부의 ‘출장 애프터 서비스’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덮치며 현지 방문은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남양주 마석에서 진접으로 옮긴 이 신부는 코로나 팬데믹 와중엔 인근 공단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마스크, 손소독제, 진단키트 등 코로나 용품 250만 점을 나눠줬다고 합니다.

올해 들어 코로나가 다소 잠잠해지고 하늘길이 열리자 이 신부는 지난 6월말 방글라데시를 9박 10일 일정으로 다녀왔답니다. 3년 사이 현지 사정도 많이 바뀌었다고 하네요. 코로나 이후 현지 경제상황도 나빠졌고요. 현지인들과 의논하는 과정에서 ‘새 일감’을 찾았다고 합니다. 장애인 일터입니다. 현지 발달장애인 등이 수작업으로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을 할 장소를 만들려는 것이지요. 공책에 수를 놓은 제품을 국내에 판매하는 방법 등을 생각하고 있답니다. 작업장은 약 80평 대지에 3층 건물 정도 규모로, 한켠엔 응급치료소도 설치할 꿈입니다.

방글라데시 통기바리에 지을 장애인 작업장의 개념도. 간단한 수작업으로 제품을 만들고, 응급치료시설도 갖출 예정이다. /이주민연대 샬롬의 집

희망도 보았답니다. 2016년 첫 방문 때 이 신부는 재활용 분리수거함을 몇 개 선물했답니다. 아무데나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고 쉬운 일부터 생활을 개선해보자는 취지였지요. 그런데 최근 방문 때까지도 수거함이 그대로 있더랍니다. 이 신부는 “물론 우리 일행이 갈 때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들도 뭔가 스스로 바꾸려고 애쓴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도 재활용 분리수거가 일상에 정착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지요. 이번 장애인 작업장 계획도 일회성으로 생필품 등을 전해주는 것보다 스스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선물하고 싶은 생각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해 내년 1월에 다시 방글라데시 현지를 방문할 예정이랍니다. 준비 과정을 거쳐서 2024년엔 청소년과 성인 후원자들과 함께 방문할 예정이고요.

재즈 보컬리스트 김준씨 등 뮤지션들이 방글라데시 귀환 이주민을 위해 개최하는 재즈 콘서트 포스터.

이 신부가 지금까지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후원자들의 도움 덕분입니다. 안타까운 사연의 외국인을 돕기 위해 노심초사, 동분서주하는 이 신부를 보면서 공감한 분들이지요. 이번에도 재즈 보컬리스트 김준씨와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씨 등은 10월 8일 강원 용평 드래곤밸리호텔에서 콘서트를 열어 수익금을 방글라데시 귀환 이주민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답니다.

생계를 위해 외국에서 일하다 귀국한 후 그 나라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신부님의 노력이 귀국한 방글라데시 사람들 사이에 좋은 기억의 동심원을 넓혀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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