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방한한 틱낫한 스님. 그의 방한과 함께 국내에서도 걷기 명상 붐이 일었다. /조선일보 DB

700년 전 독일 출신 가톨릭 신비주의 영성 대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년~1327년경) 신부와 최근 입적한 베트남 출신 틱낫한(1926~2022) 스님. 시대·지역·종교까지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는 두 영성가의 공통점을 추출해낸 ‘깨어있음’(불광출판사)이 최근 번역 출간됐다.

저자는 미국 출신으로 에크하르트 신부의 도미니코 수도회 후배이기도 한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 번역자는 동국대에서 <’깨달음 달’의 출현의 해탈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박문성 신부다.

피어스 신부는 가톨릭뿐 아니라 힌두교,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 공동체를 체험하며 종교 간 대화에 앞장선 성직자. 생전의 틱낫한 스님과 함께 수행한 경험도 있다. 저자는 에크하르트의 ‘설교와 강설’, 틱낫한의 저서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예수’ ‘귀향’을 텍스트 삼아 두 영성가의 가르침을 비교 분석한다.

14세기 신비주의 영성가 에크하르트와 틱낫한 스님의 통해 가톨릭과 불교 영성의 공통점을 연구한 '깨어있음'의 표지. /불광출판사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 보면 종교는 달라도 가르침의 본질은 서로 닿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고향’이란 개념이 눈에 띈다.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는) 고향에 있는데, 우리는 타국 땅을 헤맨다”고 했다. 틱낫한은 “억겁의 생애 동안 저는 당신(세존)과 만나기를 갈망했습니다.()거울에 비친 달을 보면서 저는 불현듯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소를 머금은 당신을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노래했다. 틱낫한은 저서 ‘귀향’에서 그리스도교인은 예수, 불교인은 붓다로 돌아가는 것, 즉 자신의 내면에서 매 순간 예수와 붓다를 만나는 것이 귀향이라고 말했다.

피어스 신부는 ‘숨’에 관해서도 두 종교의 공통점을 이끌어낸다. 틱낫한 스님은 ‘숨 쉬기 명상’을 강조했다. 잡념을 떨치고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며 마음을 챙기는 명상법이다. 피어스 신부는 성경에서 하느님이 최초로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은 것과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성령의 숨을 불어넣어준 것을 떠올린다. 하느님이 불어넣어준 숨이 일회성이 아니라 지금까지 모두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하듯이 틱낫한의 ‘숨 쉬기 명상’도 현재를 놓치지 말라는 뜻이다. 두 종교의 ‘숨’은 모두 먼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항상 깨어있으라는 가르침이다. 고통과 자기 희생 없는 사랑과 연민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공통된 가르침이다.

14세기 가톨릭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 신부. /라이문트스페킹·위키피디아

책은 이런 방식으로 ‘관대함’ ‘마음챙김과 영원한 현재’ ‘고통’ ‘연민’ 그리고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걸쳐 가르침의 공통점을 찾아간다. 저자는 종교 간 대화에 대해 가톨릭 수도원에서 그룹을 나눠 성경 구절을 번갈아 읽는 합송에 비유했다. 내 파트(종교)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상대 파트(다른 종교)의 목소리를 경청한다는 뜻이다. 틱낫한은 “프랑스 요리를 좋아하는 것이 중국 요리를 금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다. 피어스 신부는 “나는 종교 간 대화의 여정 덕분에 더 나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확신한다”고 적었다.

책이 번역된 과정도 흥미롭다. 불교 전문 불광출판사는 이 책 출간을 결정하고 번역자를 물색하다가 박 신부에게 부탁했다. 1995년 사제가 된 박 신부는 동국대 불교대학 인도철학과에 편입해 2007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톨릭대 동양철학 교수를 지냈고, ‘산스크리트어 통사론’을 펴냈으며 종교 간 대화에도 참여했다. 가톨릭과 불교 양쪽을 이해하는 최적의 번역자였던 셈. 박 신부는 “2020년 11월 번역 제의를 받고 ‘불교 출판사가 천주교 신부인 나에게?’라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며 “번역하는 1년 동안 매 순간 기적이라 생각했으며 번역 과정 자체가 종교 간 대화였다”고 말했다.

이웃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저자와 번역자 그리고 출판사의 노력 덕분에 보기 드문 역작이 국내 독자와 만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