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설리번’(한송희) 선생님과 ‘헬렌 켈러’(정지혜)의 이야기를 담은 국립극장 음악극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 어릴 적 시각장애인이었던 앤이 처음 점자를 배워 책을 읽게 되는 장면. /이태훈 기자

“새벽녘의 정원, 이슬을 머금은 잔디며 꽃, 잎사귀, 나무 줄기….”

‘앤 설리번’(한송희) 선생님이 막 단어를 익히기 시작한 ‘헬렌 켈러’(정지혜)에게 사물들의 이름과 느낌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촉촉한 냄새, 장미. 부드럽다. 가시! 장미에는 왜 가시가 있어요?” 궁금한 것투성이인 헬렌이 물을 때마다 앤 선생님은 따뜻하게 웃으며 답한다. “부드럽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지.”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10일까지 공연한 음악극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이하 ‘낙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시각장애를 극복한 앤이 시청각 중복장애 아이 헬렌을 만나 교감하며 언어를 가르치고 평생 동행하는 이야기. 이 공연의 무대는 더 특별하다. 줄거리는 앤과 헬렌의 2인극이지만, 무대 위엔 두 사람의 분신과 같은 수어 통역사 두 사람이 줄곧 함께한다. 해설 수어 통역사까지 더하면 5인극, 극의 일부로 참여하는 무대 위 음악팀 4인까지 더하면 9인극이나 마찬가지. 기획 단계부터 실시간 자막 해설과 수어 통역, 음성 해설 등으로 장애인 관객도 각자의 감각기관으로 극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무장애(barrier-free) 공연이다.

◇수어 통역사와 배우가 함께 무대에

‘앤 설리번’(한송희·사진 위 오른쪽) 선생님이 ‘헬렌 켈러’(정지혜)에게 사물의 이름을 알려줄 때, 그들의 분신과 같은 앤의 수어 통역사(김홍남·사진 아래 오른쪽)와 헬렌의 수어 통역사(정지현)는 극의 일부가 돼 함께 무대에 서서 실시간으로 대사를 전달한다. 국립극장 기획 공연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의 한 장면. 최근 예술 감상과 창작에서 장애를 넘어서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태훈 기자

장애인에게 극장 문턱은 여전히 높다. 하지만 이 문턱을 낮추고 장애로 인한 예술 감상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시도 역시 이어지고 있다. 객석 점유율 약 80%에 10명 중 1명꼴로 장애인 관객이 관람한 ‘낙타’는 그 최신 사례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해설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기본. 지난 9월 국립극장에서 객석 점유율 96%로 매진에 가까운 흥행 성적을 거둔 배리어프리 뮤지컬 ‘합★체’는 이런 노력의 선구자 같은 작품이었다. 저신장 장애인 아버지와 비장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작은 키가 고민인 쌍둥이 형제의 코믹하고 유쾌한 성장담으로, 작년 초연이 큰 호평을 받으며 1년 만에 재연 무대에 올랐다.

두 공연 모두 수어 통역사가 등장인물과 함께 무대에 서서 극의 일부가 되고, 희곡의 지문 부분을 배우가 자연스럽게 극중 일부처럼 말하는 방식으로 음성 해설을 최소화한다. 장애인도 자연스럽게 극을 감상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 ‘낙타’에선 헬렌이 ‘물’이나 ‘컵’ 같은 단어를 배울 때 글자도 물결처럼 일렁이고, 헬렌 머릿속처럼 서로 따로 놀던 글자들이 단어로 맞춰지는 모습을 시각화한다. 자막 같은 무장애 요소가 비장애인의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녹여낸 것. 작품 완성도가 높은 것도 최근 무장애 공연들의 특징이다. 국립극장 관계자는 “공정함 같은 가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젊은 관객들의 호응이 특히 컸다. 객석에서 수어로 대화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눈에 띄었다”고 전했다.

지난 9월 국립극장에서 객석 점유율 96%로 매진에 가까운 흥행 성적을 거둔 배리어프리 뮤지컬 ‘합★체’의 무대 위에서 수어 통역사는 등장인물과 함께 무대에 서서 극의 일부가 된다. 저신장 장애인 아버지와 비장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작은 키가 고민인 쌍둥이 형제의 코믹하고 유쾌한 성장담으로, 작년 초연이 큰 호평을 받으며 1년 만에 재연 무대에 올랐다. /국립극장

◇장애·비장애 예술가 함께 공연도

‘낙타’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감동을 전달하는 힘이 대단한 음악극. 본능대로 제멋대로 행동했던 헬렌이 앤의 헌신적 노력을 통해 처음 ‘물’을 나타내는 촉지화(觸指話·손가락으로 글자를 만들어 단어·문장을 표현하는 방법)를 익히고, 환희에 가득 차 주변 세상 속 사물의 이름과 느낌을 깨쳐 갈 땐 전율이 느껴진다. 시각장애인 초등학교 3학년 딸과 함께 공연을 본 어머니 조모씨는 “음성 해설이 극 흐름을 놓치거나 극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배우들이 직접 해설하듯 말해 줘 시각장애인도 극에 집중하면서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르는 경계와 장애물을 없애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모두예술극장 공연 ‘제자리’ 연습 장면. 시각, 절단, 정신, 발달 등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비장애인 예술가들과 함께 공연했다. /남강호 기자

지난 10월 서울 충정로에 개관한 장애 예술인 표준 공연장 ‘모두예술극장’은 이런 노력에 하나의 이정표와 같다. 바닥의 높낮이 차를 없애 이동이 자유롭고 엘리베이터와 경사로를 통해 접근이 가능하고, 장애·비장애 예술가들이 함께 공연을 준비할 수 있는 연습실 등 공간도 갖췄다. 장애인이 공연의 소비자뿐 아니라 생산자가 될 수 있도록 깔아놓은 멍석 같은 곳인 셈이다.

이 극장은 개관에 맞춰 전원 발달장애인 배우들로 구성된 호주 극단 백투백 시어터의 공연을 선보였다. 뉴욕타임스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고, 권위 있는 공연상인 국제 입센상을 받은 작품. 이 극장에선 지난달 말 프랑스 연출가 미셸 슈와이저가 발달·절단·정신·시각 등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워크숍을 통해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 비장애인 예술가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공연 ‘제자리’를 선보이기도 했다.